정치에 경쟁을 許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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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호 30면

지난해 가을 미국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명예회장을 만났을 때 얘기다. 사진기자들이 포즈를 요청하자 이 대통령은 “우리는 정치인이 아니다(We are not politicians)”라며 돌아서 현장에선 웃음이 터졌다. 물론 농담이었다. 이 대통령은 회의나 행사장에서 ‘아이스 브레이크’(icebreak·마음 열기) 농담을 거르지 않는 편이다. 냉랭한 분위기를 편안하게 바꾸려는 노력이다. 정부 업무보고 때 청와대 식당이 화제에 오르면 “나도 두어 번 먹어 봤는데 내가 간다고 해서 일부러 조금 나쁘게 한 것도 같고…”라고 운을 떼는 방식이 이 대통령의 화법이다.

최상연 칼럼

‘우린 정치인이 아니다’란 대통령의 농담이 아니더라도 정치와 정치인은 놀림감이거나 냉소의 대상일 경우가 많다. 한국 정치가 특히 그렇다. 정치적 조롱의 방법도 다양하게 발전했다. 새누리당 정두언 의원은 당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세상에서 하기 어려운 일 베스트 5는? 김치 없이 라면 먹기, 여자 셋이 한 시간 동안 얘기 안 하기, 소프트웨어 정품 사기, 리모컨 없이 TV 보기, 정치인 존경하기다. 그럼 이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당연히 ‘정치인 존경하기’가 압도적 1위다.”

사실 지역구를 누비는 개별 의원들의 노력과 애환은 눈물겨울 정도다. 얼마 전 서울에 지역구를 가진 한 초선 의원을 만났더니 “의원 임기 동안 민원인만 3000명을 만났다”며 이런저런 민원 사례를 소개했다. 어처구니없는 사연도 많았다. 그래도 그가 해결한 민원이 800여 건이란다. 4년을 하루같이 새벽 5시면 동네 약수터와 배드민턴장을 찾았고, 점심과 저녁 식사를 각각 서너 번 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덧붙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뛴다는 자부심이 강했다. 하지만 다른 의원의 사례도 크게 다를 게 없다. 지역구 골목길마다 “막힌 곳은 뚫고, 굽은 곳은 펴겠다”는 의원님들의 다짐이 넘쳐난다. 그런데도 뒤에선 늘 수군댄다. 정치인들 스스로도 자조(自嘲)한다.

왜 그럴까. 공중부양으로 시작해 해머질에 최루탄까지 국회에 등장한, 딱한 수준의 정치 행태가 1차적 원인일 게다. 하지만 더 따져보자. 그런 이유로 선거 때마다 의원을 절반씩 갈아치운 게 대한민국 국회다. 세계 최고 수준으로 물갈이된 국회인데도 막상 열리기만 하면 대치하고, 표결만 하면 뒤틀린다. 교육이든 사법이든 국방이든 개혁안이란 게 국회 손에만 들어가면 누더기처럼 변질된다.

18대 국회 정치개혁 특위는 그런 사례를 하나 더 보탰다. 총선이 불과 50일 앞이다. 여야의 공천 신청은 끝났고, 공천자 명단이 곧 나온다. 그런데도 국회는 선거구 획정조차 못하고 있다. 선거구가 합쳐지거나 나눠질 지역의 출마 희망자는 자신들의 선거구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 채 예비후보로 등록하고 공천을 신청했다. 정당들이 열세지역에서 당선자를 낼 수 있도록 하는 석패율제와 과감한 공천개혁으로 평가받던 국민참여경선은 아예 물 건너갔다. 역대 국회가 한결같이 반복했던 이전투구의 그 길을 이번 국회도 답습하고 있다.

구성원이 바뀌고 새 인물이 충원돼도 정치가 늘 그 모양, 그 타령인 것은 무엇보다 경쟁이 없기 때문이다. 지역 민심이 예전 같지 않다곤 하지만, 공천이 당락을 가르는 지역주의가 아직도 태풍으로 불어댄다. 본선은 여전히 요식행위고 예선인 공천 경쟁이 중요하다. 당연히 당 지도부의 눈치를 봐야 하고, 당론 표결에 따라야 한다. 당 운영과 체질이 1인자의 말 한마디에 좌우되는 구조는 깨질 기미가 없다. 여야가 따로 없다. 지역구를 돌며 귀에 못이 박이게 민심을 들었다면 정책이나 법안으로 연결돼야 한다. 하지만 약수터에서 듣는 귀와 본회의장에서 표를 찍는 손은 주인이 다르다. 그러니 찬바람 부는 골목길에서 “아니, 또 나오세요?”란 말을 듣는 것이다.

유권자를 의식해 경쟁하는 정치판을 만들려면 지역 패권을 깨는 게 우선이다. 호남에서 새누리당 의원이 나오고 영남에선 민주통합당 후보가 당선돼야 한다. 두 당 외에 이념과 정책이 다른 당도 국회에 들어가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 모두 선거제도가 바뀌어야 가능한 일들이다. 문제는 정개특위의 어깨가 무거운데도 여야 모두 책임을 통감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정치 밖에서 해답을 찾는 것은 어떨까. 정치개혁안을 만들고 결정하는 권한을 국회가 아닌 국민과 전문가들에게 넘기자는 얘기다. 정치가 고장 났는데, 고장 난 정치를 바꾸겠다는 정치까지 고장 났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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