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에 대국 안 되냐고요? 그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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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루이나이웨이 9단, 박지은 9단과 함께 ‘여자 바둑의 트로이카’로 군림해 온 조혜연(27) 9단은 11세 때 프로기사가 됐다. 여자로서는 사상 최연소고, 남자까지 합해도 조훈현·이창호 다음으로 세 번째다. 18세 때는 여자바둑 사상 최강으로 꼽히는 루이 9단을 연파하고 여류국수와 명인을 모두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다. 하지만 조혜연은 스스로 세운 신앙의 법칙에 따라 일요일 대국을 거부했고, 끝내 마스터스 결승전을 기권하면서 그의 바둑 인생은 크게 요동친다. 국가대표마저 포기하자 ×혜연, 미친× 같은 욕설이 쏟아진다.

 조혜연 9단이 펴낸 자전적 에세이 『프로기사, 캠퍼스를 걷다』는 이 과정과 심적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승부사의 인생과 운명 같은 신앙, 바둑 사랑과 바둑판 밖을 향한 동경이 가로·세로 얽히며 진지하고 티 없는 통찰로 그려져 있다. 토마스 만의 소설 『토니오 크뢰거』를 문득 떠오르게 하는 책이다.

 혜연은 유치원에서 하루 종일 책만 보는 이상한(?) 아이였는데 어느 날 “바둑 한번 배워보자”는 엄마의 권유로 잠시 바둑을 배운다. 바둑 공부를 그만두자 보름 동안 매일 바둑 두는 꿈을 꾸었다. 음악 쪽으로 사라질 뻔한 천재 혜연은 다시 바둑으로 돌아온다. 무서운 속도로 실력이 늘어 전국대회를 석권한다. 한데 이때부터 이미 ‘일요일’이 문제였다. 혜연은 세례도 받지 않은 교인인데도 6일 일하고 일요일은 예배를 본다는 법칙을 세웠다. 가족이든 교회든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고 스스로 결정했다. 한국 여자바둑의 최강자로 떠오른 뒤 혜연은 이 문제로 인해 결국 감당하기 힘든 사회적 지탄에 직면한다. 국가대표를 포기하자 “이스라엘의 신을 위해 조국을 버릴 거냐” “너는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 이단이다” “한국기원은 조혜연을 제명하라”는 비난이 쇄도했던 것이다.

 혜연은 견디다 못해 바둑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죽어라 입시공부를 해 대학에 진학한다. “외국에 가서 내가 사랑하는 바둑을 가르치며 살아야지.”

 혜연은 고대 영문과에 합격했고 여기서 딴 세상을 맛본다. 하지만 바둑을 떠나지는 못하고 힘겹게 학업과 시합을 병행하며 때론 결승까지 올라가곤 했지만 깊은 상처를 준 바둑과의 끈이 느슨해져 있었기에 루이 9단에게는 번번이 졌다. 영문학과 철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영어 바둑책도 펴내고 영문 사이트도 운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작가가 되고 싶어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승부를 향한 아련한 꿈은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서 낙인처럼 싱싱하게 살아 있다.

책을 다 읽고 문득 조혜연 9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요일 예배를 새벽에 보거나 하루 연기하면 안 되나.” “그건 안 된다.”(조 9단), “승부는 다시 시작할 건가.” “승부와 작가의 길을 놓고 방황 중이다.”(조 9단)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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