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칼럼] 예기치 않은 펀치 한 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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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가 있다. 움직이던 자전거가 정지해 있을 때 거기엔 시간이 담긴다. 아주 작은 시간일지라도 변화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어떤 형식이 거기에 스며 있다. 정지해 있는 오즈의 자전거는 일종의 정물(靜物)
이고, 말 그대로 정지해 있는 삶(사물)
still life이다.

기타노 다케시의〈키즈 리턴〉에는 또 다른 자전거가 있다. 비록 정해진 궤도를 순회할지라도 다케시의 자전거는 고요하거나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게다가 자전거가 비록 하나일지라도 바퀴는 둘 이고, 거기에 실려 있는 사람도 둘이다.

〈하나비〉나 〈소나티네〉와 비교해 본다면 〈키즈 리턴〉은 다소 싱겁게 보일지도 모른다. 다케시가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케시 영화의 하드 보일드한 스타일이나 실존적인 허무가 이 영화에는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이 영화에는 삶의 아이러니가 안개처럼 짙게 깔려 있다.

고등학교를 이제 막 졸업하고 사회에 진입한 젊은이들에게 삶이란 단지 넘어지지 않기 위해 달리는 경주일 뿐이다. 계속 달려야만 넘어지지 않는다. 왜 달리는지, 지금 내가 달리는 길에 어떻게 들어섰는지 알 수 없다. 삶에는 그렇게 우연과 운명의 두 줄이 엮여 있다.

공부를 포기한 신지와 마짱은 선생을 골탕 먹이고, 성인 영화를 보러가고, 힘없는 아이들의 돈이나 삥 뜯으면서 나름대로 시간을 죽이지만 여전히 무료하다. 한심한 인생에도 운명의 날은 있는 법. 마짱은 어느 날 정말 맞짱 한번 못 뜨고 권투 선수에게 호되게 맞는다. 우연처럼 날아온 펀치 한 방 덕분에 마짱은 권투계에 입문하고 꼬봉처럼 끌고 다니던 신지마져 억지로 떠밀려 권투를 시작한다. 단지 복수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담배와 술까지 끊고 권투를 시작한 마짱은 하지만 예기치 않은 펀치 한 방에 권투 인생을 마감한다. 심약해 보이던 신지야 말로 강펀치를 숨기고 있던 타고난 복서였던 것이다. 의지는 타고난 재능 앞에서 무릎을 끓을 수밖에 없다.

〈키즈 리턴〉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신지와 마짱이 함께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가장 인상적으로 손꼽는다. 하지만 정작 삶의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코믹하고, 심지어 가슴아픈 장면은 마짱과 신지의 권투 시합이다. 분을 참지 못한 마짱이 권투 시합을 하자고 신지를 꼬드길 때 둘의 우정을 이어주는 얇은 판막은 금새 찢겨질 것처럼 약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누군가 분풀이할 대상이 필요하다. 비록 그 대상이 가장 친한 친구일지라도 넘쳐나는 분노를 삭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허나 예기치 않은 신지의 훅 한방이 그들의 삶을 엉뚱한 방향으로 분기(分岐)
하게 만든다 - 한 명은 권투 선수로 또 한 명은 야쿠자로.

끝없이 갈라지는 두 갈래 길처럼 〈키즈 리턴〉에서 삶은 늘 두 방향으로 분기한다. 기타노 다케시는 정말 타고난 양손잡이다. 그는 늘 쌍 개념을 중시하고 그것을 이미지로 만든다. 우연처럼 삶의 행로가 뒤바뀌지만(권투선수에서 야쿠자로, 판매원에서 택시 운전사로)
운명처럼 또 삶은 정해진 길을 간다(죽음 혹은 몰락)
.

다케시는 그런 신지와 마짱의 삶을 바깥으로 표현한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학생 한 명이 물끄러미 창문 너머로 운동장을 자전거로 돌고 있는 신지와 마짱을 쳐다본다. 선생은 바깥을 보지 말라고 경고한다. 바깥은 뻔한 미래다. 이건 정말 경고다. 바깥에 뭐가 있나? 바깥 어디에도 그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안식처는 없다. 하지만 신지와 마짱은 이게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신지와 마짱은 비록 상처 입었지만 달리는 자전거 위에서 여전히 둘이자 하나이다. 자전거가 두 바퀴로 굴러가듯 삶의 우연과 운명이 쉴 새 없이 돌아갈 때 여전히 삶은 끝나지 않는다. 그 어느 하나가 멈출 때 삶이 마감된다. 다소 썰렁해 보이긴 해도 삶은 둘이 주고받는 만담에 가깝다. 절제, 미묘한 균형, 즉흥적인 호흡이 그래서 필요하다.

Joins 엔터테인먼트 섹션 참조 (http://enzone.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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