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온 이탈리아 와인 혁명가, 72세 안젤로 가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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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와인 잡지 ‘치비타 델 베레’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10대 명품 와인’이란 설문을 실시했다. 대상은 이탈리아 내에 있는 171개 유명 레스토랑의 소믈리에, 홀 매니저, 주방장 그리고 레스토랑 주인들이었다. 이 설문에서 선정된 10개의 명품 와인 중 3개는 한 와이너리에서 만든 것이었다. 바로 이탈리아의 와인 명가 ‘안젤로 가야’였다.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역 와인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주인공이자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소규모의 ‘오리지널 와인’만을 생산해 내는 고집스러운 와인 메이커. 한국을 방문한 72세의 열정적인 와인 장인 안젤로 가야에게서 이탈리아 와인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집념’의 일대기를 들어봤다.

글=서정민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올해 72세의 안젤로 가야. “나는 아직도 젊다”고 얘기하는 그는 “매일 저녁 두세잔의 와인을 마시는 게 건강의 비결”이라고 했다. 영화 ‘대부’에 출연했던 배우 말런 브랜도를 연상케 하는 외모에서 카리스마와 열정적인 고집이 느껴진다.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역에는 바롤로(Barolo)와 바르바레스코(Barbaresco)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이 있다. 둘 다 지금은 피에몬테 최고의 와인을 생산해 내는 곳으로 ‘이탈리아 와인의 왕과 여왕’으로 불리지만 그 시작은 차이가 있었다. 바롤로의 와인이 처음부터 최고의 와인으로 불렸다면, 바르바레스코의 와인은 그보다 한 단계 아래 등급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1980년부터는 얘기가 달라진다. 이 해에 바르바레스코가 당당히 DOCG(단일 포도원에서 단일 품종의 포도로 만드는 등 엄격한 조건을 통과한 최고의 이탈리아 와인에 붙는 등급)를 받았기 때문이다. 안젤로 가야가 이끌어낸 ‘이탈리아 와인 혁명’의 결과였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안젤로 가야로부터 ‘이탈리아 와인의 혁명’이 시작됐다”고 말한 바 있다.

 “이탈리아에선 와인을 숙성시킬 때 전통적으로 대형 나무통을 사용했다. 나는 월드 클래스급 와인을 만들려면 프랑스에서 생산한 225L의 작은 오크통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에몬테 지역의 와이너리들에선 생각조차 못했던 일을 내가 처음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가야는 피에몬테에서 작은 오크통을 사용하기 시작한 최초의 와이너리가 됐다.”

 -작은 오크통을 사용하면 와인의 맛이 어떻게 달라지나.

 “큰 통을 사용하면 숙성 시 산소 접촉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통상 4년에서 5년의 숙성기간이 필요하다. 작은 오크통을 사용하면 와인의 산소 접촉도가 높아져서 2년~2년6개월 정도 숙성 후 와인 출시가 가능해진다. 이렇게 되면 와인의 신선도가 높아지고 오랜 숙성 시 색상이 누런 오렌지빛으로 변하는 것도 개선시킬 수 있다. 결정적으로는 바르바레스코 와인의 오랜 문제점으로 지적돼 온 거칠고 텁텁한 맛을 부드럽고 우아한 맛으로 바꿀 수 있었다.”

 -‘단일 포도밭’의 개념도 가야에서 처음 시작했는데.

 “우리가 생산하는 와인의 품질을 철저히 관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67년에 선보인 와인 ‘소리 산 로렌조’는 우리가 단일 포도밭에서 네비올로 포도 품종으로 생산한 최초의 와인이었는데 출시되자마자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일부 와이너리들은 포도를 키우지는 않고, 포도 또는 포도즙을 사다가 와인만 만든다. 또 여러 포도밭의 포도를 섞어서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는 와인의 품질관리를 제대로 할 수 없다.”

 -고품질 와인만을 만들겠다는 ‘장인정신’을 위해 또 어떤 원칙들을 갖고 있나.

 “첫째 원칙은 앞에서 말한 단일 포도밭 개념이다. 둘째 원칙은 와이너리의 규모를 키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와이너리 규모가 커지면 컨트롤 능력이 떨어지고 와인의 품질도 그만큼 떨어진다. 최근 22년 동안 가야의 와이너리 규모는 변함이 없다. 100㏊의 포도밭에서 연간 35만 병만을 생산한다. 포도 품질이 불량한 때는 아예 와인을 생산하지 않는 것도 우리의 원칙이다. 실제로 46년, 72년, 80년, 84년, 92년, 2003년엔 와인을 생산하지 않았다.”

 -와이너리 규모를 키우지 않는다는 것은 비즈니스에 욕심이 없다는 말로 들린다.

 “돈을 많이 버는 장사꾼보다는 고객을 실망시키지 않는 농부이고 싶다. 여러 등급이 있는 와인 피라미드 구조에서 가야의 목표는 최상위 그룹이다. 하위 구조에 속하는 값싼 와인을 만들면 돈을 벌기는 쉽지만 그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우리가 만드는 양이 적더라도 최고의 가야 와인을 기다리는 고객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 그것이 가야의 원칙이다. 그래서 전 세계 와인 수출량도 동일하다. 어느 나라의 와인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졌다고 해서 그 나라에 더 많은 양의 와인을 주진 않는다. 우리를 오랫동안 사랑해 준 고객을 먼저 존중하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와인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버트 몬다비와의 합작을 거절한 이유도 ‘소규모 장인 와인’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나.

 “맞다. 지난 40년간 와인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은 로버트 몬다비일 것이다. 80년에 그와 처음 만났고 우린 매우 좋은 친구가 됐다. 80년대 중반과 90년대 초반, 두 번에 걸쳐 몬다비가 합작사업을 제의했을 때 나는 거절했다. 그의 제안이 친구로서 고맙긴 했지만 몬다비가 몸집을 너무 키운 게 아닌가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40분 동안이나 합작사업의 장점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는 몬다비에게 당시 난 이런 대답을 했다. ‘합작사업은 결혼을 하는 것과 같다. 서로 존중해야 하며 같은 꿈을 공유해야 한다. 하물며 섹스도 중요하다. 그런데 모기와 코끼리의 섹스가 가능하겠나.’(웃음) 연간 35만 병을 생산하는 가야와 연간 1200만 병을 생산하는 몬다비는 모기와 코끼리의 관계였으니까. 그 이야기를 들은 몬다비는 호탕하게 웃으며 ‘아쉽지만 무슨 뜻인지 알겠다’고 했다.”

1 가야 바르바레스코. DOCG 등급을 받은 가야 와이너리의 대표 와인이다. 단단한 구조감과 실크같이 부드러운 타닌이 매혹적이다. 30년 이상 숙성 가능하다. 2 프로미스. 토스카나 지역에서 처음 만든 와인이다. 늘 최상의 와인을 만들겠다는 고객과의 ‘약속’을 이름에 담았다. 3 다르마지. 이탈리아 토착 품종인 네비올로 대신 프랑스에서 들여온 카베르네 소비뇽 포도로 만든 와인. 이 계획을 반대했던 아버지가 남긴 ‘유감’이라는 말이 와인의 이름이 됐다.

 -당신의 ‘와인 혁명’은 프랑스의 작은 오크통을 쓰는 것 이전에도 이미 시작됐다고 들었는데.

 “78년에 아버지 몰래 카베르네 소비뇽을 가야의 포도밭 귀퉁이에 심기 시작했다. 이 포도나무가 피에몬테 지방에 최초로 심은 프랑스 품종의 포도였다. 이 포도로 만든 와인의 이름이 ‘다르마지(Darmagi)’인데 ‘유감’이란 뜻이다. 800년 동안 네비올로 포도만 키웠던 땅에 카베르네 소비뇽을 심은 것을 아버지는 무척 반대하셨다. 그래서 아버지가 출장 가 계신 동안 내가 몰래 일을 저질렀다. 그렇게 해서 만든 와인이니 아버지로선 ‘유감’이었을 것이다.”(웃음)

 -왜 아버지를 실망시키면서까지 카베르네 소비뇽에 관심을 보인 건가.

 “카베르네 소비뇽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품종이고 어느 나라에서도 잘 자란다.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역에선 어떤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아버지도 나중엔 나의 국제감각을 칭찬해 주셨다.”

 -90년대 후반에 토스카나 지역에도 와이너리를 만들었다.

 “피에몬테에 있는 가야 와이너리의 규모를 키우고 싶진 않았지만 우리에겐 새로운 와인을 만들고 싶은 꿈과 열정이 있었다. 토스카나 지역은 좋은 와인을 만들기 좋은 장소였기 때문에 우리의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곳에서 만든 첫 와인의 이름이 ‘프로미스(Promis)’인 것도 좋은 품질의 와인을 만들겠다는 고객과의 약속을 의미한다.”

 -‘가야 와인’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열정으로 만든 장인의 와인이다.”

 -이탈리아 와인들과 어울리는 음식을 추천해 줄 수 있나.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과 와인이라면 어떤 것이든 훌륭하게 어울린다. 와인이든 음식이든 즐기기 위해 먹는 것이니까. 오히려 기준이나 규칙 같은 건 아예 잊어버리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게 더 큰 즐거움을 얻는 방법일 것이다. 세상에는 죽을 때까지 먹어도 다 못 먹어볼 만큼 많은 와인과 음식이 존재한다. 새로운 것을 느낄 수 있는 도전을 마음껏 즐겨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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