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의 음식잡설 (19) 가짜 향 전성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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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물이 좋은 고등어로 스파게티를 하고 있는데, 항상 신선도가 문제다. 고등어를 사온 당일만 최고의 맛을 낸다. 나름대로 양념에 재웠으니 맛이 유지되면 좋으련만, 고등어의 숙성 그래프가 꺾이면서 누구 표현대로 ‘맛의 저수지로 두 발목을 잡아 끄는 듯한’ 풍미는 희미해진다.

 냉이 같은 향 좋은 봄나물도 그렇다. 언젠가 그 향을 오래 즐겨보려고 넉넉히 사서 저온으로 익힌 후 냉동한 적이 있었다. 막상 먹으려고 했더니, 냉이 특유의 알싸한 향은커녕 거칠고 쓴맛만 났다. 원하는 향을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다면 우리의 식생활은 더 풍요롭고 멋질 텐데 그게 쉽지 않다. 식품의 맛과 향은 현대 과학으로도 그 메커니즘을 다 알지 못한다. 현대의 음식문명은 보존 기술에선 혁혁한 성과를 얻었지만, 반대로 자연의 풍부한 향을 잃어버리게 됐다. 우주 삼라만상의 숨겨진 이치는 언제나 인간의 욕망을 야멸차게 배신해 버린다.

 인간은 음식을 먹을 때 그 향에 매료된다. 뇌가 ‘맛있다’고 느끼는 것은 혀보다는 코에 더 의지한다. 감기에 걸리면 음식 맛을 잘 모르는 것이 그 증거다. 복잡한 현대사회는 엄청난 양의 인스턴트 식품을 시장에 쏟아낸다. 우리는 그 식품을 먹으면서 여전히 본능적으로 혀보다 코를 가동한다. 그래서 식품회사들은 상품의 향에 각별한 신경을 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향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마련인 법. 결국 그들이 선택한 건 인공 향이었다.

 놀랍게도 녹차 음료에는 녹차향이, 보리 음료에는 보리향이 들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렌지 주스에는 물론 오렌지향이, 레몬 주스에는 레몬향이 들어가는 게 기본이다. 인체에 해롭지 않으니 사용허가가 났겠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건 어쩔 수 없다. 색깔이 진하고 요란할수록, 청소년들이 즐기는 음료일수록 들어가는 인공 향이 많아진다. 단순히 어떤 향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첨가물 때문에 생긴 나쁜 냄새를 가리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아 기분이 개운치 않다.

 커피도 다르지 않다. 요새 커피를 둘러싼 인공첨가물 광고 공세가 벌어지고 있다. 나는 그쪽으로는 문외한이지만 ‘광고란 으레 그런 것이야’ 하고 넘어가기에는 속상한 구석도 있다. 최근 한 광고에서 화제가 된 인공 크림 말고도 인스턴트 커피에 들어 있는 인공첨가물에서 자유로울 회사가 어디 있느냐는 얘기다. 적어도 내가 눈으로 확인한 인스턴트 커피에는 모두 커피향이 들어 있었다. 설마 하실 분도 있겠지만 그건 엄중한 사실이다. 커피에 커피향을 넣는다는 사실에 실소를 흘리다가 문득 작은 깨달음도 얻었다. 세상 만물을 다 정복한 것 같은 인간이 겨우 음식에 가짜 향이나 쓰고 있다는 그 적나라한 한계, 요즘 말로 ‘찌질한’ 수준을 우주 앞에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점 말이다.

 식품의 인공 향을 두고 누군가는 ‘이것이야말로 가상현실의 진면목’이라고 갈파했다.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가상현실이 더 리얼하게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시대. 우리는 오늘도 어쩔 수 없이 온갖 가짜 향이 들어간 음식을 먹고 마시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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