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박 의장과 김 수석의 국민 기만에 분노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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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때의 ‘300만원 돈봉투’ 사건과 관련해 자리를 지키며 버티기를 하던 박희태 국회의장이 결국 사퇴했다. 검사 출신으로 법무부 장관을 지낸 6선 국회의원인 그는 돈봉투 문제에 대해 거짓말로 일관하다 치욕스럽게 정치인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권력자가 부도덕하면 어떤 말로(末路)를 맞게 되는지 박 의장은 또 하나의 생생한 사례를 남겼다.

 그는 국회 대변인을 통해 의장직 사퇴의사를 밝히면서 “모두 제 책임으로 돌려달라. 국민 여러분께 정말 죄송하다”고 했다. 그의 비서였던 고명진씨의 고백으로 더 이상 ‘모르쇠’로 잡아뗄 수 없게 되자 비로소 사과하며 책임지겠다는 입장을 낸 것이다. 당시 전당대회의 대표 경선 때 박 의장 캠프에서 상황실장을 맡았던 김효재 청와대 정무수석도 거짓말을 한 걸로 드러난 만큼 더 이상 대통령을 보좌하는 자리에 남아 있을 염치가 없게 됐다. 그도 책임 있는 처신을 하지 않으면 더 큰 치욕이 그의 이름을 더럽힐 것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고승덕 의원이 “전당대회 때 돈동투를 받아 돌려줬다”고 처음 폭로했을 때 박 의장과 김 수석은 곧바로 진실을 밝혔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들이 국민을 철저히 기만했다는 지탄을 받는 것만은 면했을 것이다. 그들이 경선에서 대의원 표를 돈으로 사려 했던 건 불법이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거짓말로 국민 전체를 속인 것은 한층 더 나쁜 짓이고, 그래서 국민은 더욱 분노한다. 그들이 처음부터 의혹을 부인하고 나선 건 수중(手中)의 권력을 이용해 진실을 감추려고 꼼수를 부린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검찰에 소환된 고명진씨가 고 의원 측으로부터 돈봉투를 돌려받아 자신이 썼다고 진술했을 때 박 의장과 김 수석은 무슨 일을 했는지 돌이켜 보라. 고씨는 ‘고백의 글’에서 “책임 있는 분이 자기가 가진 권력과 아랫사람의 희생만으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고백하겠다는)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책임 있는 분’이 누구인지와 관련해 “그분이 고 의원에 대해 ‘일면식도 없다’고 거짓 해명을 하면서 일이 여기까지 이어졌다”고 언론에 말했다. 책임을 아랫사람에게 전가하고, 꼬리를 자르려고 했던 사람이 김 수석이라고 얘기한 셈이다.

 김 수석이 그랬다면 박 의장과 상의했을 것이라고 보는 건 상식이 아닐까 싶다. 두 사람이 공모해 ‘책임의 선 긋기’를 하려 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충분히 살 만하다는 얘기다. 두 사람은 불똥이 자신들에게뿐 아니라 여당과 이명박 대통령에게까지 튀는 걸 막기 위해 그랬는지 모르지만 고씨의 고백으로 추론할 수 있는 그들의 행위는 졸렬하기 짝이 없다. 대한민국 국회의장과 청와대 정무수석이 국민을 기만하는 것도 모자라 책임을 ‘깃털’에게만 덮어씌우려고 했다는 의심을 사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국가의 망신, 국격의 추락이 아닐 수 없다.

 박 의장은 “모든 걸 짊어지고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국민이 원하는 건 그런 정치적 레토릭이 아니다. 박 의장과 김 수석이 전당대회 때 무슨 일을 했는지, 왜 돈을 뿌려야 했는지, 그 돈은 어디서 났는지, 이 대통령과 관련은 없는지, 사건이 터진 다음 모른다고 잡아떼면서 뒤로는 어떤 일을 꾸몄는지 등에 대해 낱낱이 알고 싶은 것이다. 두 사람은 이제라도 석고대죄(席藁待罪)하는 마음으로 잘못을 있는 그대로 고(告)해야 한다. 그리고 사법 처리를 스스로 청해야 한다. 그게 공직자로서 국민에게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