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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테마파크’에 담긴 일상 … 조상들의 일기 훔쳐보는 재미 드라마·영화로도 꽃피우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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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안동 분들에겐 미안하지만 다른 고장 사람들이 경북 안동시에 대해 갖는 느낌은 대체로 보수성·완고함·고루함 등이다. 제사를 철저히 챙기고 보학(譜學)에 밝으며 여성의 지위가 낮다는 이미지도 따라다닌다. 안동시의 캐치프레이즈도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다.

 몇 년 전 안동 여행을 하던 중 외지 출신으로 그곳에서 생활하는 학자 한 분을 만났다. 안동에 대한 선입견을 얘기했더니 자기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대학생들을 데리고 서울의 모 대학을 방문했단다. 캠퍼스에서 담배 피우는 여대생을 목격한 안동 학생들이 수군수군하더니 자신에게 와 “저 학생에게 단단히 주의를 줘야겠다”고 하더란다. 쓴웃음 지으며 만류했지만 불만이 가시지 않는 표정들이었다고.

 그런 안동, 그것도 ‘도산면 퇴계로’라는 엄숙하기 짝이 없는 주소지에 자리잡은 한국국학진흥원이 일을 냈다. 7일 발표회를 하는 ‘스토리 테마파크(http://story.ugyo.net)’ 구축 사업이다. 조선시대 일기자료를 한글로 풀어 사건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그림·사진 등 관련 자료를 곁들여 ‘이야기 창고’를 꾸민 것이다. 1차분 600 건의 이야기 소재를 만드는 데 3억원이 들었다. 번역·감수·관련자료 보강·데이터베이스화(化)·웹서비스까지 한 건에 50만원이라는 적은 예산으로 해냈다. 고루한 안동에서 최첨단 스토리 창고가 탄생한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일기를 훔쳐보는 재미가 각별하다. 암자에서 과거시험 공부를 하던 양반 유생은 하인이 스님과 싸우자 스님을 매질한다. 스님에게 술을 사오라는 심부름도 시킨다. “불교는 있는 것을 없다 하고, 천주교는 없는 것을 있다 한다”며 유교 입장에서 두 종교를 비판한다. 그러나 창부(倡夫·남자 광대) 세 명과 반년간 놀고 즐기다 눈물 흘리며 헤어지는 장면에선 인간적인 면모가 물씬 풍긴다(서찬규 『임재일기』). 조상들의 삶과 생각이 손에 잡힐 듯하다. 테마파크 작업을 한 ㈜엠엔씨마루의 최희수 대표는 고구려 지방통치제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드라마 ‘인수대비’ ‘뿌리깊은 나무’에서 영화 ‘왕의 남자’에 이르기까지 역사 소재 창작물이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작가 김별아의 최근작 『채홍』도 조선왕조실록에 ‘레즈비언’으로 등장하는 순빈 봉씨가 모델이다. 스토리 테마파크처럼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번역·정리된 고전 자료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작가들이 정확한 원문 자료에 기초해 상상력·창의력을 발휘하면 심심치 않게 제기되던 드라마의 ‘역사 왜곡’ 논란도 줄어들지 않을까. 『해리 포터』『반지의 제왕』도 토대는 신화와 전설이다. 기록문화에 강했던 조상들이 남긴 선물을 너무 오래 방치해 왔다. 제대로 챙기면 재미와 돈이 함께 쏟아질 것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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