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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이자 피스토리우스였던 한 친구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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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아무도 없을 때를 기다렸다. 수채화 물감을 펼쳐놓고 되는 대로 떠오르는 얼굴을 두 장 그렸다. 그리고 당시 같은 병을 앓고 있던 제기동 친구에게 달려갔다. 그 친구는 누나들과 살고 있었으나 저녁 때까지는 늘 혼자였다. 어둑한 오후 우리는 큼지막한 촛불 한 개를 켜놓고 한 시간쯤 불만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 친구에게 그림 두 장을 보여주고 고르라고 했다. 그는 머리채를 삿갓처럼 산발한 기괴한 인물을 가졌고 나는 주황색으로 둥그렇게 얼굴 테두리를 그린, 역시 그로테스크한 나머지 한 장을 가졌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지금 내겐 그 그림이 없다. 그 친구는 아직 가지고 있을까?

에바 부인이 없다는 걸 빼고 그 친구와 나는 〈데미안〉의 모든 부분을 흉내냈다. 싱클레어는 한 장을 그렸지만 난 취한 듯한 기분으로 두 장을 그렸고, 피스토리우스처럼 오르간을 잘 칠 순 없었지만 우리는 음악실에서 잠깐 그 흉내도 내보았다. 벽난로의 장작불을 촛불 한 자루로 대신했어도 우리의 배화식(拜火式)은 아주 그럴듯했다. 친구는 내게 데미안이자 피스토리우스였고, 친구에게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생각하면 치기 어린 짓이었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의 그 일은 아직도 내게 성인이 되기 이전까지의 가장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의 열정을 생각하면 지금 그 친구와 연락이 끊긴 것도 희한할 지경이다. 왜 그렇게 흉내내고 싶었을까?

우린 둘 다 싱클레어와 너무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둘 다 어린 시절에 프란츠 크로머 같은 놈에게 시달려본 경험이 있었다. 다만 크로머를 제거해준 데미안이 없었을 뿐이다. 비록 우리는 싱클레어만큼 밝은 양지의 집안을 가지고 있지 못한 처지였지만 크로머로 인해 어둠의 세계를 알게 된 것은 싱클레어와 다를 바 없었다.

사실 우리에게 데미안이 없는 건 당연했다. 우리는 싱클레어처럼 두 세계가 극명하게 대립되면서 병존하는 공간에 살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데미안이 크로머를 꼼짝없이 제압한 것만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악의 상징인 크로머는 카인의 표지를 이마에 붙인 데미안, 그리고 데미안이 표상하는 선과 악을 모두 지닌 아프락사스 신을 거역할 수 없었을 테니까. 부분이 전체를 당해내지 못하듯이.

카인의 표지? 그래, 친구와 나는 책에는 없는 카인의 표지를 그려본 적도 있었다. 왜 사람들은 카인에게 죽임을 당한 아벨에게 연민을 품을까? 왜 카인은 항상 마땅한 존중을 받지 못하는 걸까?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 하나를 쳐죽였어. 정말 형제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결국 모든 인간이 형제잖니. 그러니까 어떤 강자가 어떤 약자 하나를 때려죽인 거야. 그게 영웅적인 행위였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다른 약한 사람들이 이제 잔뜩 겁이 난 거야."

우리는 데미안의 그 설명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역사는 항상 강자가 이끌어왔으면서도 누구나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약자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강자의 위선일 뿐이다. 우린 결코 강자가 아니었지만 강자를 마음껏 두둔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게 페어플레이라고 믿었다. 엇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라스콜리니코프는 벌레같은 전당포 노파를 망치로 때려죽이고 있었다.

지금 나는 그 친구와 그 후에 깨닫게 된 사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는 게 본능에 위배된다는 것은 아마도 옳은 말일 것이다. 다리를 다친 사자는 무리에 끼일 수 없고 결국은 하이에나들에 의해 최후를 맞는 게 본능이고 자연이다. 그럼 냉정하게 말해 '경쟁력'이 뒤질 수밖에 없는 장애인은 어떻게 봐야 할까? 장애인을 보호하는 것은 인간사회의 의무다. 그걸 인간사회의 새로운 '본능'이라 할 수 있을까?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까, 아니면 자연의 지배자 혹은 조정자일까? 거칠게 봐서 앞의 것은 동양의 도교적 관점이고, 뒤의 것은 서양의 기독교적 관점이다. 아닌게 아니라 장애인 혹은 약자를 보호한다는 인간사회의 의무는 동양 사회에서 아직까지도 인색하다. 인간중심주의와 환경중심주의가 논리적 모순을 빚고 있는 현재의 환경론과 생태론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문제는 있지만.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기독교적 전통을 거부하라고 충고한 것이다. 그가 거부하라고 한 것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자연의 본능이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는 인간사회의 '본능'이다. 그걸 대변하는 게 바로 기독교다. 그러나 데미안의 말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뜻은 아니다. 도교는 물론 계몽주의와도 관련이 없다.

데미안은 선과 악을 초월하는 초인을 말하고 있다. 시대적 정황으로 보면 아마 헤세는 니체의 초인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니체도 그랬지만 헤세도 곧이어 독일 사회에 닥쳐올 파시즘에 대한 경계심이 전혀 없었기에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헤세가 가명으로〈데미안〉을 발표한 이유는 파시즘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의 신에 대한 죄책감일 것이다.

하지만 헤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기독교에서 벗어나 있는 우리는 아프락사스의 개념을 오히려 잘 안다. 기독교는 겉으로는 유일신앙이지만 철학적으로 강고한 일원론을 유지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선한 신에게서 악의 관념을 파생시켜 사탄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아프락사스는 헤세가 벗어나려 했고 부정하고자 했던 기독교의 신에 다름아니다. 결국 헤세의 새, 데미안의 새는 알을 깨고 나오지 못했고 세계를 깨뜨리지 못한 셈이다.

그래도 그 친구와 만나 다시 한번〈데미안〉의 장면들을 흉내내고 싶다는 치기가 든다. 가을이라설까?

남경태 (dimeola@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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