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 이기주의, 감기약 수퍼 판매 또 발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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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약 등의 약국 외 판매’ 논의를 위한 대한약사회 대의원총회가 26일 서울 대한약사회관에서 열렸다. 대의원들이 명단을 확인하고 있다. [연합뉴스]

회사원 박기용(31·대전 동구)씨는 이달 초 콧물이 나오고 목이 많이 아팠다. 충북 청원군 회사 주변에는 약국이 없어 낮에는 약을 살 데가 없었다. 밤 10시 넘어 퇴근하면서 대전의 집 근처 약국 몇 군데를 들렀지만 문을 연 데가 없었다. 박씨는 “야근이 잦아 늦게 퇴근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감기약을 구하기가 힘들다”며 “편의점에서 약을 판다고 들었는데 정작 필요한 감기약은 언제부터 파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구 약사회장

 박씨의 이 같은 불편이 계속될 전망이다. 감기약 수퍼 판매의 키를 쥐고 있는 대한약사회(회장 김구)의 입장이 오락가락해서다. 약사회는 26일 임시 대의원 총회를 열어 보건복지부와 수퍼 판매 협의를 계속할지를 논의했다. 복지부와 협의하는 것은 수퍼 판매를 찬성한다는 것이어서 사실상의 수퍼 판매 찬반이 이날 의제였다. 합의에 실패하자 표결 처리했지만 어느 쪽도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했다. 이날 참석한 대의원(282명)의 과반수가 돼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반대 141명, 찬성 107명, 무효표가 4명이었다. 반대가 의결정족수에 한 표 모자랐다. 약사회 김동근 홍보이사는 “의결정족수에 미달해 (수퍼 판매) 안건 자체가 채택이 안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집행부는 수퍼 판매에 찬성하고, 서울·경기·전남·광주 지역약사회는 반대하는 모호한 상황이 이어지게 됐다. 이날 이런 상황에 종지부를 찍자고 대의원 총회를 열었지만 결론을 못 낸 것이다. 김동근 이사는 “집행부가 복지부와 협의를 계속하더라도 상당한 부담을 안고 갈 수밖에 없게 됐다”고 말했다. 게다가 반대가 한 표 모자라는 상황은 ‘사실상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지난달 22일 약사회 집행부가 수퍼 판매를 전격적으로 찬성한 상황이 사실상 물거품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시 입장을 바꾼 이유는 여론 때문이다. 국민의 83%가 수퍼 판매에 찬성하는 상황을 계속 무시했다가는 집단이기주의라는 비판에서 헤어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날 회의는 초반부터 찬성파와 반대파가 격돌했다. 김구 회장이 수퍼 판매 찬성 배경을 설명했다. 김 회장은 “회장으로서 명분(수퍼 판매 반대)과 실리 사이에서 명분만 고집할 수는 없었다”며 “현행 2분류 체계(전문·일반약)를 유지하면서 예외조항을 두고, 판매 장소와 품목을 제한하기 위해 복지부와 협의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회장의 설명이 끝나자 대의원석에서 “복지부를 어떻게 믿느냐”며 항의가 시작됐다. 경기도의 한 대의원은 “생존이 걸린 문제인데 (수퍼 판매는) 절대 안 된다”고 소리쳤다. 이어 찬성파와 반대파가 각각 5명 나와 입장을 설명했다. 찬성파는 “정부와 논의한 협상안이 불발하면 (약사회를 비판하는) 여론과 정부의 압박을 견딜 수 있느냐”고 우려했다. 반대파는 “최소한의 품목으로 수퍼 판매를 시작한다 해도 결국 일반약 전부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고 맞받았다. 토론은 5시간 계속됐고 고성과 야유, 욕설이 오갔다. 대의원끼리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감기약 수퍼 판매를 시행하려면 국회에서 약사법 개정안이 통과돼야 한다. 26일 약사회 입장이 정리되지 않음에 따라 2월 국회에서 법안이 처리되지 않을 가능성이 커졌다. 2월 국회에서 통과돼야 8월부터 수퍼 판매가 가능해진다.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은 지역약사회 눈치를 보느라 약사법 개정안을 상정조차 하지 않고 있는데 이 같은 상황이 달라질 만한 여지가 다시 좁아졌다.

◆대한약사회=시·도 16개 지부 산하에 228개 분회를 두고 있다. 약사 면허 소지자 6만여 명 중 3만여 명이 회원이다. 대부분 약국을 운영하 기 때문에 지역사회 여론에 영향을 많이 미친다고 한다.

약사회 집행부 판매 허용 안건 놓고
어제 대의원총회 5시간 욕설·고성
정족수에 1표 미달 … 반대 훨씬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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