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ㆍ질투 그리고 시베리아 유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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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러시아 국가를 작사한 시인이고 할아버지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화가로 태생부터 출세를 향한 절반의 성공을 거둬 놓은 니키타 미할코프. 그는 1994년 〈위선의 태양〉으로 한국 관객에게 얼굴을 알린 러시아 중견 감독이다.

스탈린 숙청의 잔혹함을 유연한 표현력과 특유의 리듬감으로 읽어낸 〈위선의 태양〉으로 칸 영화제 국제비평가상 등을 휩쓸며 인지도를 높인 그가 몇 년간의 휴식 끝에〈러브 오브 시베리아〉를 내놨다.

이 영화는 〈사브리나〉〈가을의 전설〉 등에서 청순하면서 지적인 이미지를 보여준 줄리아 오몬드가 주연을 맡은데다 5천 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되고 제작비가 5백80억원에 이른다는 점에서 할리우드 블록 버스터 전략을 차용하고 있다.

"관객들은 더 이상 볼거릴 없는 영화를 찾지 않는다. 스펙타클한 영화는 이제 러시아 영화의 지향점이 돼야한다" 고 역설하는 미할코프 감독이 할리우드 전략으로 할리우드 극복하기에 나선 것이다.

〈러브 오브 시베리아〉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러시아를 무대로 러시아 사관 생도와 미국 여인의 사랑을 웅장한 화폭에 담아냈다.

1885년, 모스크바행 기차에 한 무리의 러시아 사관 생도들이 승차하며 러시아 고위층 로비를 위해 방문한 제인(줄리아 오몬드)과 톨스토이(올렉 멘시코프)가 만난다.

제인은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거침없이 부르는 톨스토이를 보곤 가슴이 설레고 톨스토이 역시 천진스럽고 요염한 제인에게 이끌린다.

하지만 사관학교 교장 레들로프 장군이 이들의 사이에 끼어든다. 격정적인 사랑을 나눌만큼 둘이 가까워졌을 때, 톨스토이는 로비를 위해 레들로프 장군을 유혹하는 제인을 목격한다.

제인의 진심을 의심한 톨스토이는 러시아 황태자가 참여한 '세빌리아의 이발사' 공연 도중 바이올린 활로 레들로프를 폭행하고 만다. 그에게 황태자 암살이란 엄청난 누명이 씌워지고 곧 시베리아로 유배된다.

여기부터 영화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운명이 갈라놓은 것을 다시 맞추지 못하는 인간의 안타까움은 벌판을 처연하게 내달리는 증기기관차의 울음으로 대신하고 갈수록 애절해지는 그들의 사랑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광활한 시베리아 설원과 호수에 반사된다.

제인과 톨스토이의 사랑이 이야기의 축이지만 얼음판 위에서 2천명의 엑스트라들이 웃통을 벗고 축제를 만끽하는 장면과 씩씩하면서도 익살맞은 러시아 사관 생도들이 보여주는 활기참은 2시간 30분이 넘는 시간을 풍성하고 즐겁게 만든다.

여기에 모차르트와 쇼팽의 섬세하고 힘있는 클래식을 러시아적 풍광에 맞춰 재해석해낸 솜씨가 탁월하다.

무엇보다 특수 효과가 없는 장쾌한 화면이 주는 즐거움은 오랜 만에 선보인 대서사 로망의 묘미다.

그러나 러시아 문화를 너무 가볍게 처리했다는 것과 러시아적 색채보다는 할리우드 기법이 많이 가미됐다고 해서 평단에서는 '타이타닉의 러시아 버전' 혹은 '클래식한 할리우드 감상주의' 라고 깎아내리기도 한다.

99년 칸 영화제 개막작. 30일 개봉.

- Note -

러시아로 건너간 줄리아 오몬드(제인). 그녀의 미소에 한 남자의 운명이 무참히 내려앉는데‥. 전작 〈사브리나〉가 해리슨 포드를 위한 영화였다면 〈러브 오브 시베리아〉는 청순함과 요염함을 한껏 분출하는 오몬드를 위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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