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 종착지는 불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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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혹시 30대 이상의 연배이고 따라서 대학시절 교양강좌 '철학개론' 을 수강했던 사람이라고 하자. 신간 〈차이와 타자〉와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 은 당시 귀동냥했던 어휘들을 머리 속에서 일단 지워버릴 것을 권유한다.

용도폐기된지 이미 오래이고, 알고보면 우리 몸에 맞지않는 옷이니까. 이를테면 데카르트, 칸트, 인식론, 그리고 주체, 자아 등의 형이상학적 어휘들….

서구 지식사회에서 이뤄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사유 혁명을 소개하고 있거나(〈차이와 타자〉), 아니면 독자적인 사유로 두터운 팬들을 확보해온 운동권 출신의 스타 저술가 이진경(본명 박태호)이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고쳐 쓴(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책 두권은 한마디로 '모더니즘을 넘어선 새로운 지평' 을 꿈꾸고 있다.

새로운 지평이란 아직은 명확한 주소는 없이 방향만이 어렴풋하게 가늠되는 지적 모험의 새 공간.

단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두 책은 우리가 음미해봐야할 철학목록어을 입력시켜준다.

질 들뢰즈, 레비나스, '비 표상적 사유' , '코뮨적 생활공간' …. 사는 일에 바빠 미처 지적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 당신에게 이런 어휘들은 낯설 수 있다. 그러나 전하는 메세지는 명쾌하다.

"인간(주체,에고)이란 개념은 본디 데카르트나 칸트 등 고전적 근대철학자들이 탄생시킨 테마일 뿐이다. 즉 자기정체성을 말하는 '나' 란 개념은 만들어진 허구일 수도 있다. 현대철학자 질 들뢰즈에 따르면 인간은 임의적이거나 자의적인 규정에 근거한 개념에 불과하다면서 인간을 해체시켜 버린다." (서동욱)

"근대인, 주체라는 것은 대체 어떻게 탄생을 했고, 또 어떻게 재생산되는가. 나는 주체가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들에서 출발점을 갖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외려 특정 조건 속에서 구성되어지는 것으로 본다. 즉 가정 학교 공장등이 근대사회가 요구하는 주체를 만든다." (이진경)

어떤 것을 원조(元祖)로 보느냐를 두고 두 저자 사이에 약간의 편차가 눈에 띌 것이다. 그러나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제의식은 닮은꼴이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진 인간 주체라는 것은 '부도가 난 약속' 일 수 있고, 따라서 그 것과의 결별은 시대적 대세라는 점이다.

눈여겨 봐야할 점은 이런 문제의식이란 놀랍게도 에고(我像)이라는 것을 철저히 부정했던 불교적 인식론, 세계관을 닮아간다는 점이다.

어쨌거나 앎이 이뤄지는 장소이자 중심축으로 상정되온 인간의 붕괴, 거기에 근거한 모더니티(과학과 문명 전체)의 해체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두 책은 실은 쉽게 접근할 책은 아니다. 약간의 지적 훈련이 필요하며, 특히 이진경의 책은 매우 전문적이다.

또 우리가 사는 일상의 관심과는 거리가 있어보이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우리 주변의 거의 모든 것이란 실은 근대적 주체를 둘러싼 환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서구 근대성을 산출해낸 주체 중심주의가 붕괴됐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할 몫은 무엇인가를 가늠해 보는 작업이다. 동북아의 지적 유산까지 끌어안는 새 정지작업, 그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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