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얼굴] 고국에 첫 금메달을, 양정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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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도 이긴 경기.

1976년 8월 1일(한국시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결승전에서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다.

모리스리처드 경기장에서 벌어진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 결승전에서 몽골의 즈베이진 오이도프는 한국의 양정모(47)에게 10-8로 판정승 했다. 하지만 당연히 기뻐해야 할 그는 고개를 떨구며 슬퍼했고 패한 양정모는 껑충껑충 뛰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 경기에서는 오이도프가 승리했지만 결승리그 전체 벌점 계산에서 양정모가 앞서 금메달을 차지한 것이다. 당시에는 별도의 결승리그를 통해 종합 성적에서 앞서는 사람이 우승을 차지했다.

선수의 성적은 6벌점제를 적용해 계산했다. 6벌점제는 폴 승은 벌점이 없고 판정승은 1점, 폴 패는 4점, 판정패는 3점의 벌점이 주어지는 제도로 벌점합계 6점이면 자동 탈락된다.

몬트리올 올림픽 자유형 페더급 결승리그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2번 우승한 오이도프(몽고), 존 데이비스(미국) 그리고 양정모가 맞붙게 됐다. 양정모는 데이비스와의 경기에서 폴 승을 거두면서 은메달을 확보했고 마지막 경기에서도 유리한 위치에 올라섰다.

세 선수간에 진행된 결승리그는 마치 잘 짜여진 각본처럼 오이도프와 양정모의 경기까지 이어졌다. 양정모와 오이도프는 올림픽에서 맞붙기 전에 이미 두 차례 경기를 통해 서로에게 한번씩 패배와 승리를 안겨줬었다. 양정모보다 신장이 10cm이나 큰 오이도프는 양정모의 장단점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천적이었다.

하지만 오전 경기에서 오이도프는 데이비스에게 판정패를 당해 3점의 벌점을 안고 양정모와의 경기에 임했다. 오이도프는 양정모에게 폴 승을 거둬야만 금메달을 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경기 결과 승리는 오이도프에게 돌아갔지만 행운의 여신은 양정모의 손을 들어 주었다. 2라운드 이후 지연 작전으로 큰 점수를 허용하지 않은 앙정모는 경기에서 10-8로 패했지만 벌점 계산에 의한 성적에서 1위를 차지, 건국 이후 첫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큰 선물을 고국에 안겨줬다.

양정모의 금메달은 손기정(88)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제패한 이후 꼭 40년 만에 쾌거였다. 또 태극기를 앞세우고 올림픽에 참가하기 시작한 1948년 이후 첫 금메달이었다.

손기정의 금메달이 암울했던 시대에 민족에게 한 줄기 빛을 안겨준 선물이었다면 양정모의 금메달은 새로운 시대를 향해 발전하는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뜻 깊은 선물이었다.

1953년 2월 28일 부산에서 태어난 양정모는 부산 남일 초등학교 6학년 시절 호기심으로 매트에 올라가 친구들과 몸싸움을 한 것이 계기가 돼 레슬링과 인연을 맺었다. 건국상고, 동아대를 거치면서 유망한 레슬러로 성장한 양정모는 71년 주니어 세계 선수권대회 자유형 페더급에서 은메달을 따내면서 국제무대에서의 가능성을 인정 받았다.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72년 뮌헨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최종 선발전에서 장경무를 꺾고 출전권을 따낸 양정모는 대한체육회의 '소수정예 파견원칙'에 의해 뮌헨행 비행기에 오르지 못했다. 올림픽 출전이 좌절된 후 양정모는 극심한 슬럼프에 빠지면서 운동을 떠나 방황하기 시작했다.

1년 가까이 운동을 떠난 양정모는 운동이 아닌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도 했지만 정동구 코치와 오정용 코치의 격려와 끈질긴 설득으로 다시 레슬링을 시작했다. 좌절을 뒤로하고 다시 매트에 선 양정모는 정동구 코치의 혹독한 훈련을 소화하면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꿈을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양정모의 꿈은 74년 테헤란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안 게임에서 세계선수권자인 몽고의 오이도프를 꺾고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하나씩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아시안 게임에서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양정모는 올림픽에서 우승하기 위해 자신의 단점인 스피드 보강에 주력했다.

정동구 코치 역시 양정모가 보강해야 할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양정모에게 강한 훈련을 시켰고 정 코치의 훈련을 묵묵히 소화한 양정모는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최고의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올림픽 시상대에서 처음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울리는 현장은 전 국민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양정모의 올림픽 제패로 레슬링은 전 국민의 관심을 받는 종목으로 성장했고 각 기업은 서둘러 산하 경기 단체를 만들어 레슬링을 육성했다. 결국 양정모의 금메달은 한국이 세계적인 레슬링 강국으로 발전하는 기틀이 됐다.

몬트리올 올림픽에 이어 78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하면서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한 양정모는 올림픽 2연패에 도전하기 위해 맹훈련을 거듭했지만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정치적인 이유로 자유진영이 출전을 포기함에 따라 꿈을 접어야만 했다.

결국 14년간의 선수생활을 정리하고 80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소속팀 조페공사의 트레이너, 코치, 감독을 역임하며 지도자로서 한국 레슬링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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