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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떼기를 위한 변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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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

연초 경제정책의 화두는 물가다. 특히 농산물이 문제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구상에 20달러짜리 배추가 어디 있느냐”고 말하면서부터다. 경제부처는 ‘물가 차관보’ ‘배추 국장’ 등을 지정하고 총력전이다.

 수십 년 된 레퍼토리도 다시 나왔다. 농민은 남는 게 없는데, 소비자 가격은 안 내린다는 것이다. 결국 중간상인이 이득을 다 가져간다는 비판이다. 배추시장에서는 특히 ‘밭떼기’가 악덕 상인의 대명사로 통한다. 이들의 폭리로 농민이 1000원에 판 배추를 소비자는 2000원에 산다는 식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밭떼기란 밭작물을 통째로 사가는 방식을 말한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배추 1000개가 나오는 밭을 밭떼기한 상인은 1000개를 다 팔지 못한다. 밭에서 캐는 과정에서 상품으로 내놓지 못하는 게 나온다. 두터운 겉잎을 떼어내니 중량도 줄어든다. 운반하면서 생채기가 생긴다. 기온이 조금만 올라도 배추는 무른다. 이를 농업계에선 ‘감모(減耗)’라고 한다. 배추 감모율은 30% 안팎이다. 저장 기간이 길면 50% 이상으로 올라간다. 1000포기 사서 700포기, 심하면 500포기를 판다는 얘기다. 700포기로 잡아보자. 포기당 1000원에 계약했다면, 중간상인의 비용과 이익을 하나도 반영하지 않아도 소비자 가격은 저절로 1400원이 된다.

 감모만이 아니다. 신선도를 유지하려면 저온 저장시설도 필요하다. 깨끗하게 손질해 팔려면 인건비도 들어간다. 소비자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이런 비용은 앞으로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게 다 돈인데, 대부분 고정비여서 산지 가격 하락 폭만큼 소비자 가격이 내려가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밭떼기가 가격 상승의 죄를 다 뒤집어쓰는 건 아무래도 과하다.

 밭떼기의 긍정적 기능도 있다. 다 자란 배추를 사기도 하지만, 상당수는 일찌감치 가격을 정해 계약한다. 재배 비용을 대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수확기 배춧값이 오르면 농민이 손해를 본다. 가격이 내리면 중간상인이 손해다. 그러나 이는 가격 변동 위험을 피하면서 서로 안정적 판로와 공급처를 확보하는 데 따른 대가다. 이 점에서 밭떼기는 정부가 권장하는 계약 재배와 종이 한 장 차이다.

 물론 나쁜 상인도 있다. 구두계약을 하고는 가격이 내리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잠적한다. 그러나 이런 장사치는 어디에나 있다. 이런 걸 솎아내 시장 질서를 잡는 게 정부 역할이다. 그렇다고 밭떼기를 물가의 적으로 몰아가선 안 된다. 매년 밭떼기 계약이 성사되는 건, 밭떼기가 시장이 필요로 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모든 거래를 직거래로 바꾸는 것은 가능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 결국 방법은 밭떼기를 적극적으로 양성화해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효과가 당장 나올 리 없다. 하지만 이게 지름길이다. 단기 효과를 기대하며 ‘때려잡자 밭떼기’를 외쳐온 게 이미 수십 년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