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운전기사·보일러공 거쳐 부지점장 … 나는 언제나 그 다음 단계를 꿈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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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은 이철희(사진)입니다. 기업은행에 다닙니다. 나이는 쉰세 살. 운전기사·보일러공 출신입니다. 11일 차장에서 부지점장으로 승진했습니다. ▶<관계기사 e1면>

기업은행이 생긴 이래 보일러공이 부지점장이 된 건 처음이랍니다.

 저는 1974년 봄 고향 전남 영암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 왔습니다. 1년간 서울 자양동 플라스틱 공장에서 일했지요.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했지만 빛이 안 보였습니다. 고등학교라도 나와야겠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모아둔 돈을 들고 고향으로 내려가 영암종고를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별로 안 달라지더군요. 군 제대 후 다시 서울.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지게를 지면서 또 이를 악물었습니다. ‘기술을 배워야겠다.’ 점심 때면 눈치를 보며 운전면허 학원으로 뛰어갔습니다.

 83년 기업은행에 취직했습니다. 운전기사직. 7년간 핸들을 잡았습니다. 평생 직업은 아니더군요. 열관리기능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이후 8년간 기업은행 성동지점에서 별정직 보일러공으로 일했습니다. 매일 보는 은행원들이 부러웠습니다. 정식 은행원이 되고 싶다는 꿈이 자꾸 커졌습니다. 보일러공으로 일하면서 지점 잡무를 도왔습니다. 인덕전문대 사무자동화학과(야간)도 졸업했지요.

 98년 같은 지점에서 꿈에도 그리던 은행원(기술계)이 됐습니다. 하지만 ‘별정직 보일러공 출신’이란 꼬리표는 좀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기술계라 고객 상대 업무는 제도적으로 맡기 어려웠습니다. 포기하고 싶어졌습니다. 전문 기술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에 서울산업대에 편입했습니다. 그런데 기술사 자격증 학원에 등록하러 갔더니 그날따라 학원 문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마음을 다시 잡았습니다. 어깨 너머로 은행 업무를 공부했습니다. 금융자산관리사·선물거래상담사 등 금융 관련 자격증도 9개 땄습니다.

 마흔세 살이던 2002년. 은행에 들어온 지 20년 만에 본격적으로 고객 상대 업무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진짜 은행원이 되다니! 기뻤습니다. 진심으로 고객을 대했습니다. 문자메시지 하나를 보내도 판에 박힌 말 대신 진심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항상 고객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화를 내는 고객도 웃으면서 대했습니다. 한 번 두드려 마음을 열지 않는 고객은 세 번, 네 번 찾아갔습니다. 실적은 저절로 쌓이더군요. 2009년 다른 은행들과 경쟁해 재개발아파트 집단 중도금 대출 500억원을 유치했습니다. 지난해엔 제가 아파트 담보대출을 해 드린 한 기업 간부가 “나이든 사람의 열성에 감동했다”며 회사의 은행 업무를 맡겨주시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약 500억원의 예금도 유치했습니다. 그 전엔 다른 은행이 차지했던 예금이지요. 은행에서 ‘예금왕’ 상도 받았습니다.

 지금도 저는 매일 아침 7시까지 지점에 출근해 보일러를 관리합니다. “정식 은행원이 됐는데 왜 그런 일을 하느냐”며 말리는 분도 있습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저를 키워준 은행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잘해야 앞으로도 저 같은 사람이 많이 나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2년 뒤면 정년입니다. 하지만 저처럼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도 퇴직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 기사는 본인 동의를 얻어 인터뷰 내용을 본지가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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