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배추의 힘 … 흉년에도 풍년에도 같은 가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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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1. 주부 최경여(51·인천)씨는 10년째 충북 괴산군에서 절임배추를 주문해 김장을 해왔다. 무엇보다 품질이 좋아서다. 지난해는 배추 값이 내려 더 싸게 살 수 있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구입처를 바꾸지 않았다. 최씨는 “2010년 배추 가격이 급등했을 때 괴산 농가 덕분에 싼값에 김장을 했다”며 “오랫동안 직거래를 하며 쌓인 신뢰가 있기 때문에 바꿀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2. 괴산군에서 농사를 짓는 전광업(57)씨는 13년째 절임배추를 예약 판매하고 있다. 최씨도 전씨의 고객이다. 품질은 자신 있다. 문제는 가격이다. 기후 통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김장철 석 달 전에 소비자에게 고지한 가격을 지킨다. 그는 “2010년 배추 가격이 급등했을 때 주문받은 걸 취소하고, 값을 더 쳐주는 ‘밭떼기(중간 상인에게 밭 생산물을 통째로 넘기는 것)’를 한 농민은 올해는 배추를 못 팔아 난리였다”고 말했다.

 들쭉날쭉하는 농산물 가격이 연초 정부 경제정책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전문가는 기후 등 통제가 안 되는 변수가 많은 농산물 가격을 단기간에 잡겠다는 목표 자체가 틀렸다고 지적한다.

 안정적 가격이 경쟁력이 된 괴산 절임배추도 하루아침에 된 게 아니다. 13년 뚝심이 있어 가능했다. 괴산 절임배추는 1998년 첫선을 보였다. 괴산 문광면 농가가 예약 주문을 받으면서부터다. 안정적인 가격이 안정적인 판로를 만드는 것을 보면서 주변 농민의 생각이 바뀌었다. 2001년 괴산시골절임배추생산자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지금은 950여 농가가 회원이다. 규모가 커지자 가격 변동을 흡수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소금은 매년 초 비수기에 대량 계약을 해 원가 변동을 줄였다. 정순천(60·사진) 회장은 “정해진 가격 이상으로 받는 농민은 협의회에서 퇴출시키면서 소비자와의 가격 약속을 지켰다”며 “오랫동안 직거래를 하면서 한두 해 보고 장사를 해선 안 된다는 확신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런 성과가 쌓이면서 자신감도 붙었다. 괴산 절임배추는 2010년과 지난해 각각 가격 인상 요인이 있었다. 2010년은 배추 가격이 전년보다 세 배 비싼 포기당 1만원을 웃돌았다. 그러나 협의회는 25% 올린 가격에 판매했다. 20㎏에 2만5000원이면 당시 절임 배추 평균 가격의 5분의 1 수준이었다. 가격 변동성을 줄인 효과는 지난해 김장철에 더욱 빛을 발했다. 지난해는 배추 값은 내렸지만 소금값이 두 배로 올랐다. 2010년 이득을 많이 못 남긴 것도 부담이 됐다. 그러나 협의회는 가격을 동결했다. 소비자도 외면하지 않았다. 2만원 초반대의 절임배추를 파는 곳이 있었지만, 지난해 괴산 절임배추의 판매액은 273억원으로 전년보다 51억원이 늘었다. 정 회장은 “앞으로 4년 주기로 고정 가격제를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정부도 비슷한 직거래 예약 판매를 지난해 시도했다. 농수산물유통공사가 20㎏당 2만9900원에 절임배추를 예약 판매했다. 시장 평균가(3만5000~4만원)보다 낮은 가격이었으나 준비된 물량의 40%밖에 팔지 못했다. 홈쇼핑과 유명 인터넷 쇼핑몰까지 동원한 결과다. 오랫동안 다져진 시스템과 농민의 변화 없이는 1회성으로 농산물 물가를 잡을 수 없다는 얘기다. 최지현 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당장 성과가 나지 않더라도 꾸준히 농가 규모를 키우고, 산지에 안정적인 출하 시스템을 만들어야만 농산물 가격의 변동성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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