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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 기브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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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서승욱
도쿄 특파원

“네바 네바 네바 네바… 기부 아뿌(ギブ-アップ).”

 엄숙하게 진행되던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의 4일 신년 회견에 다소 우스꽝스러운 일본식 영어 답변이 등장했다.

 정권의 명운을 걸고 추진 중인 소비세 인상에 대해 ‘당 안팎에 반대가 많은데 포기할 뜻은 없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노다가 “좋아하는 영어 단어가 여섯 개 있다”며 이렇게 되받아친 거다.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며, ‘네버 기브업(Never Give-up)’의 ‘네버’를 네 번이나 외쳤다.

 노다와 집권 민주당은 현행 5%인 소비세율을 2014년 8%, 2015년 10%로 올리는 방침을 지난 연말 확정했다. 밤 12시까지 이어진 마라톤 회의에서 반대파 의원 23명과 맞짱을 뜬 게 얼마나 피곤했던지, 노다는 고향 지바(千葉)현의 고교 동창회에서 “사방팔방에서 총탄이 날아오고, 뒤통수(아군)에서도 총탄이 빗발친다. 당을 설득하느라 뼈가 부러질 정도였다”고 토로했다.

 그 뚝심의 원천은 명분이다. 일본의 국가 빚은 1000조 엔, 우리 돈으론 1경5000조원이다. 국내총생산(GDP)의 200%에 달하는 부채비율은 아프리카 몇 나라를 빼면 비슷하게 견줄 나라조차 없다. 세수보다 국채 발행액이 많은 기형적 구조도 이어지고 있다. 증세 외엔 재정건전화를 이룰 방법이 없으니, 큰 명분은 그가 쥐고 있는 셈이다.

 반대파에게도 명분은 있다. 민주당 내 반대파인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전 대표와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총리는 “증세는 ‘세금을 올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2009년 민주당의 총선 공약 위반”이란 명분을 내걸고 있다. 눈엣가시 같은 노다를 흔들어 당을 다시 접수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는 게 틀림없지만, 겉으론 “대국민 약속 위반은 안 된다”며 명분을 놓지 않고 있다. 과거 증세를 주장했던 야당 자민당도 지금은 ‘증세를 하려면 먼저 국민들에게 재신임을 물으라’며 동조하고 있다. 노다의 명분에 비하면 다소 허술해 보이지만, 세금 인상이 달갑지 않은 국민들 사이에선 이들의 논리가 의외로 먹히고 있다. 그러니 정치적으론 꽤 짭짤한 명분이다.

 일본 민주당만큼 한국의 집권당에도 뜨거운 1월이다. 친이계와 친박계의 반목은 극에 달하고 있다. 친이계 중진들과 점령군 격인 비대위원들은 상대방이 쇄신 대상이라며 연일 서로를 할퀴고 있다.

 그간 각종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만 찍어왔다는 한 지인은 최근 기자에게 “과거엔 알면서도 속아주고, 속는 척하며 찍어주고 했었는데 이번엔 한나라당 후보를 찍을 엄두가 안 난다”고 털어놓았다. 노다의 증세 명분까지는 아니더라도, 오자와의 증세 반대 명분 정도는 기대했던 보수층에게조차 한나라당이 실망감만 안겨주고 있다는 푸념이다. 나라와 당은 어찌되건 내 국회의원 배지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는 ‘그들만의 네바 기부 아뿌’가 계속된다면 승리는커녕, 자칫 멋진 패배조차 만들기 어려워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