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쇼이 국내 초연 '스페이드 여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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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는 유명한 아리아·중창 서너 곡으로 요약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특히 주역가수들 못지 않게 합창단의 활약이 돋보이는 차이코프스키의〈스페이드 여왕〉같은 오페라에서는 남녀 주인공보다 조연이나 군중의 음악적·극적 비중이 크게 부각된다.

25일 러시아 볼쇼이오페라단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린〈스페이드 여왕〉의 국내 초연무대에서 1막의 어린이 합창, 2막의 여성합창, 3막의 남성합창이 번갈아 나오면서 작품의 무게중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 작품에서 합창은 독창·중창의 배경 구실을 하면서 분위기를 만들어 갈 뿐만 아니라 음악과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오페라 그 자체였다.

등장인물들의 표정이나 몸짓에서 연출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전체를 꽉 채운 웅장한 무대를 전환하는 데 필요한 2회의 중간휴식(각 30분)을 포함해 4시간 가까이 소요되는 공연이었지만 지루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등장인물들은 그룹에 따라 여러개의 동선(動線)으로 한꺼번에 움직이면서 무대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3막 피날레에서 남자 주인공 게르만(테너)의 권총 자살로 막을 내리기 전 정지상태에서 부르는 무반주 남성합창은 도박장의 장난기 섞인 놀이·흥겨운 분위기와는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인간 영혼의 깊숙한 곳에 감동의 불을 지핀다.

특히 여성이 단 한명도 출연하지 않는 제3막에서 등장한 남성합창단은 대부분 40~60대로 구성돼 중후한 느낌에다 일종의 프로의식 같은 것이 느껴졌다.

주역 가수의 캐스팅에만 힘을 쏟을 뿐 합창단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는 국내 오페라 제작 현실과는 대조적이었다. 오페라 공연을 앞두고 주역가수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합창단·극장까지 결정해야 하는 게 국내 현실이다. 볼쇼이는 극장에서 오페라를 공연하기 위해 성악가·합창단·오케스트라·발레단을 산하에 두는 경우다.

마르크 에름레르가 지휘하는 볼쇼이는 대편성 오케스트라이고 주연 성악가들이 풍부한 성량을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절제된 음량으로 섬세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에름레르는 성악과 관현악의 음량을 잘 안배해 차분하게 음악을 이끌어나갔다.

러시아어 가사를 못 알아듣고 한글 자막을 볼 시간적 여유가 없어도 걱정할 일이 아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듣고만 있어도 대략적인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화려한 장면은 가발과 궁정의상·무도회가 등장하는 제2막. 목가적인 극중극(劇中劇)을 삽입해 주인공의 속마음을 보여준다.

발레 장면은 러시아가 자랑하는 저음 성악가(메조소프라노·베이스 등)들이 빚어낸 전체적으로 어둡고 음울한 무대에 잠시나마 밝은 분위기를 선사한다. 원근감과 리얼리티를 살린 중후한 무대장치도 볼거리다.

27일까지 오후 7시30분. 28일은 출연 성악가들과 합창단이 차이코프스키·베르디·푸치니의 아리아와 중창·합창으로 꾸미는 갈라콘서트를 펼친다. 02-3701-5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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