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스물 여섯번째 편지〈이런 꿈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밤에 다시 당신과 길을 떠납니다. 내 전화에 당신은 급히 배낭을 꾸리고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고 차를 점검합니다. 음식점에서 만나 돌솥밥을 먹습니다. 그게 아무리 잠시라도 집을 떠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문단속에 가스 점검에 신경이 쓰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고 아무리 꼼꼼이 챙겨도 늘 빠트리는 게 있기 마련입니다.

더군다나 느닷없이 집을 나서게 되면 마음 한편이 불안하기도 합니다. 없는 동안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그러기에 충동적으로 길을 떠나는 일은 때로 무모한 일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부음을 받은 사람처럼 그때마다 기어이 집을 나서고야 맙니다. 길이 부르는 데야 어쩔 수가 없습니다. 늘 길 떠나는 사내를 만난 당신은 어쩌면 힘든 꿈을 꾸며 사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녁 9시 30분에야 궁내동 서울 톨케이스를 빠져나갑니다.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 정읍 거쳐 다음날 새벽에 선운사 입구 동백호텔에 짐을 풉니다. 휴가철이 지나 호텔은 텅텅 비어 있습니다. 96년 4월에 약 보름을 묵었던 302호실에 듭니다. 이제 단풍철이 될 때까지 호텔은 썰렁하게 비어 있을 것입니다.

고단한 여로에 아침 10시에나 일어나 1층 식당으로 내려갑니다. 호텔 주인인 박희숙 씨와 마주칩니다. 봄에 왔으니 올해 두 번째 이곳에 내려오는 셈입니다. 그녀는 반갑게 이쪽을 맞으며 아침 상을 차려줍니다. 그녀는 숙대 국문과 출신으로 김남조 선생 밑에서 허영자 시인과 함께 공부를 했습니다. 짐작하지 않아도 당연 문학 소녀였습니다.

그러다 고창 출신의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나서 '주인을 따라' 엉엉 울며 당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이곳 선운사 동구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벌써 삼십 년. 밤마다 별을 바라보며 사람이 그리워 숱하게 울었다고 합니다. 옛 여인에게 생은 또한 그러한 것이었던가.

밥값을 안 받겠다고 하는 박희숙 씨와 부득부득 다투다 복분자술 두 병까지 얻어 가지고 호텔을 떠납니다. 내년 봄이 되면 다시 오리란 허망한 말을 남겨놓은 채.

여름 선운사는 처음입니다. 벚나무 길을 지나 미당 시비 앞에서 사진을 찍고 추사 김정희가 쓴 화엄종주 백파율사의 추도비를 보고 선운사로 들어갑니다. 찻집에서 시큼한 오미자 차를 마십니다. 여름 선운사는 녹음에 깊게 둘러싸여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동백숲도 여름내 더위에 지쳤는지 소리가 없습니다. 대웅전에 들어가 삼배를 올리고 방명록에 당신의 주소를 씁니다. 건명 곤명을 씁니다.

봄엔 그토록 애닯던 곳인데 늦여름인 지금엔 그때 마음의 자취조차 없습니다. 마당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백일홍만이 눈을 서글프게 합니다. 마른 꿈 속에 발을 들여놓은 듯 중력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선운사를 나와 풍천을 지나 고창 고인돌(지석묘) 유적지에 들렀다 30번 도로를 타고 곰소를 지나 내소사로 갑니다. 늦여름 더위가 들녘에 짱짱합니다. 군데군데 가을이 슬그머니 찾아와 복병처럼 숨어 있는 게 보입니다.

일주문을 지나 전나무 길이 아름다운 내소사로 들어갑니다. 내소사는 병풍처럼 뒤에 둘러쳐져 있는 암벽과 숲이 절을 고요히 내려다보며 끌어안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대웅전 창살문이 유명하고 연꽃을 기르는 돌연못이 있고 담장에 쌓아놓은 무수한 작은 돌탑들이 있습니다. 당신이 돌 한개를 주워 그 위에 쌓으려고 합니다. 내가 말립니다. 왜요? 하며 당신이 나를 돌아봅니다. 지금은 없어졌는데 몇 년 전에 왔을 때는 담장 기와에 이런 말이 씌어 있었습니다.

"담 위에 돌(탑)을 쌓지 마시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머리 깎고 출가하게 됩니다."

〈인과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나라면 혹시 몰라도 당신을 출가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세속에서도 당신은 맑은 법(法)을 지니고 사는 사람입니다. 굳이 승려가 될 필요는 없을 터입니다. 분재처럼 생긴 마당의 소나무를 보고 당신이 중얼거립니다.

"여름인데도 솔잎이 봄처럼 연두색으로 아주 맑군요."

그렇습니다. 소나무뿐만이 아니라 능가산 내소사의 모든 것은 다 맑습니다. 후박나무의 냄새도 맑고 물빛도 맑고 기왓장 하나하나도 다 맑습니다. 대웅전 천장 그림 속의 공후도 장고도 가야금인지 거문고인지도 하나 같이 맑습니다. 저녁 예불 때 들려오는 종소리 또한 그렇습니다. 이토록 정갈한 사원은 남한에 아마 몇 없을 겁니다.

그러나 뒷전을 돌아보며 그곳을 다시 떠나옵니다. 격포 채석강으로 갑니다. 가는 길 구비구비 썰물의 바다가 아득히 펼쳐져 있습니다. 서해 바다는 시커먼 갯벌이어서 물이 빠지면 이내 서글픔으로 그것이 또 격해지면 마침내 욕정으로 변합니다.

낙조가 아름다운 채석강엔 늦더위를 피해 온 사람들이 물속에서 옷을 적시고 있습니다. 채석강 그늘을 누워 나는 잠시 잠이 듭니다. 옆자리에서는 대학생들로 보이는 청년 셋이 소주를 마시며 무슨 얘긴가를 열심히 주고받고 있습니다. 당신은 옆에 앉아 길게 늦여름의 바다를 내다보고 있었지요.

꿈에, 바다에, 백일홍이 지고 있습니다. 눈을 뜨니 커다란 물고기가 배가 고픈지 저녁 바다에서 뛰고 있습니다. 옆에서 당신이 노을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합니다. 동진강이 불쑥 눈앞에 떠오릅니다. 어차피 30번 도로를 타고 서울로 가는 길입니다.

중간에 냉면 한 그릇 씩을 먹고 새만금 간척지를 지나 동진강 휴게소에 도착했을 때는 7시. 자판기에서 뽑아온 쓰디쓴 커피를 마시고 동진강으로 내려갑니다. 붉은 뻘밭이 아득히 좌우로 펼쳐져 있습니다. 거기서 당신과 노을을 기다립니다. 오랜 세월 김제평야를 먹여 살려온 동진강 개펄엔 낡은 배들이 숱하게 모로 쓰러져 있고 흙냄새에 속이 동학(東學)처럼 울렁거려 옵니다.

마침내 강에 노을이 집니다. 배들이 점점 개펄 속으로 깊이 가라앉습니다. 강물이 여름과 다퉜던 하루치의 흐름을 어둠 속에 숨기며 고요해집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비가 내립니다. 춥습니다. 빌 에반스의 트럼펫 연주 〈이런 꿈들〉이 사무치게 듣고 싶습니다. 당신은 옆에서 눈을 감고 잠들어 있습니다.

어제오늘의 생이 또 내게는 정녕 꿈이었던가. 그렇다면 당신도 꿈이었을까. 언제든 길을 가아먄 하는 어느 속절없는 사내의 꿈 속에 나타난 정령이었을까.

남쪽은 그리 더웁고 맑았는데 서울은 폭우였습니다.

다시금 새벽. 복분자술을 마시며 혼자 빗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당신은 상기 멀리서 혼자 잠들어 있겠습니다. 맑은 솔잎과 백일홍의 꿈을 꾸고 있겠습니다.

꿈이 깨기 전에 당신께 바삐 돌아가지요. 내가 곁에 당도하기 전에는 부디 꿈에서 깨어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 오늘도 고단하게 이어지는 이 머나먼 생의 열대. 여름날 하루치의 목숨을 다시 갉아먹은 내 이런 꿈들. ***

〈지난 리스트 보기〉
〈작가 인터뷰및 프로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