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블루에 어려 있는 그리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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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ins.com 오현아 기자

"너른 바다 한중간, 따뜻하고 푸른 물 속에서 아이는 헤엄을 치고 있다. 해파리처럼 부드럽고 우아하게. 아이는 한없이 자유롭게 황홀해 보인다. 깊고 너른 바다 속이건만, 그리고 혼자인데도 아이는 조금도 무서워하는 것 같지 않다. 멀리서 누군가 아이 이름을 길게 끌며 부른다. 아이는 천천히 소리나는 데로 돌아본다." (〈솔로 트래블러〉18쪽)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 문학평론가이자 단편영화 감독인 김영혜 님이 '키노 로망'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책을 펴냈다. '키노 로망'이란 영화를 글로 옮긴, 영화의 산문판인 셈이다. 영화〈희생〉과〈노스탤지어〉를 만든 안드레이 타르코브스키의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대표적인 '키노 로망'이라고.

김영혜 님이 영국국립영화학교(National Film & TV School)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할 당시 영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찍은 사진이 책의 이미지를 더욱 서정적으로 만든다.

〈솔로 트래블러〉(효형출판 펴냄)는 'K'라는 여성이 영국 런던의 한 서점에서 고래가 그려진 엽서를 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검푸른 바다에 등과 꼬리만 내놓은 채 유영하는 고래 두 마리, 아스라히 들리는 울음소리. K는 그 구슬픔에 홀린 듯 엽서를 손에 쥐고 서점을 나선다.

음침하게 도시 전체를 덮고 있는 잿빛 안개, 햇빛 들어오지 않는 어둠침침한 하숙방, 뼈에까지 사무치는 외로움. K는 어스름 내리는 황혼 녘, 쫓기듯 짐을 꾸리고 하숙방에서 나온다. 등 푸른 고래를 보겠다는 목적 하나로. 가방 속 책갈피에는 고래 그림엽서가 꽂혀 있다.

바닷가를 찾아 낯선 도시에 찾아들지만 K는 적막한 변두리 길에 매혹된다. 길모퉁이에서 K는 푸른 저녁 어스름 속에 핀 노란 장미꽃을 보고 발걸음을 멈춘다. 오버랩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노인네는 햇볕도 잘 들지 않는 옹색한 화단에서 몇 시간이고 꽃을 들여다본다. 구석에 핀 조그만 보랏빛 꽃이 대견하다는 듯이. '나'는 어둠이 내려도 들어오지 않는 노인네가 홀로 무엇을 하는지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바다를 찾아가는 길 위에서 K는 다양한 외로움과 그리움을 만난다. 떠나고 싶어도 어두운 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 만남이 그리워 모여들지만 결국 일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사람들, 조롱과 빈정거림으로 외로움을 달래는 중년 남자, 홀로 빈 집으로 돌아가는 소처럼 선한 눈을 가진 전직 선원, 그리고 '외로워서 죽은' K의 아버지.

차가운 바다에는 고래가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K는 스코틀랜드의 오크니를 찾아간다. K는 비바람 치는 검푸른 바다를 대면하고 자신에게 묻는다. 무엇이 자기를 여기에까지 이끌었는지. 그때 문득 멀리서 처량히 호소하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다시 그 먼, 구슬픈 울림. K는 탄성처럼 나직이 내뱉는다. '아, 아버지!'

"어디선가 형용할 수 없이 구슬픈, 멀리서 길게 끌리는 듯한, 하소연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아니면 악기 소리 같기도 한 그 소리에 이끌려 아이는 소리나는 데로 걸어간다. …… 그 소리는 사내 곁에 놓인 조그만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아이는 사내한테 바싹 다가가서는 묻는다. 〈아빠, 이게 무슨 소리야?〉…… 〈깊고 먼 바다 속에 사는 고래들이 우는 소리란다.〉"(이 책 236~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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