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북한의 조혈, 중국의 수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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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장세정
베이징 특파원

격동의 한 해가 될 거라고 입을 모았던 2012년이 마침내 밝았다. 하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한 달 앞서 이미 지난해 말에 모종의 변화가 시작됐다. 김정일 사망이라는 돌발 변수 때문이다. 가변성이 커진 것이다. 그런데 김정일 사후 주변국들이 보인 반응을 복기(復棋)하면서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모두가 입을 맞춘 듯 북한의 안정을 외친 것이다. 줄곧 안정 타령을 해온 중국은 그렇다 치자. 급변사태를 은근히 기대했던 한국·미국까지 안정을 앞세웠다. 북한 체제의 빠른 변화를 갈망해온 실향민과 탈북자라면 속으로 분통을 터뜨렸을 것이다.

 북한의 안정이란 말 속에 담긴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돌발 리스크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이 엿보인다. 북한의 안정이란 논리를 진전시켜 보자.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세습 정권의 안착과 다른 게 뭔가. 중국의 한 지인은 “마오쩌둥(毛澤東)이 1976년 9월 9일 숨진 뒤 한 달 만에 사인방(四人幇)이 축출됐다. 북한에도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직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에선 치밀하게 준비한 듯 세습 즉위식이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혼란 조짐보다는 안정 국면이 연출되고 있다.

 북한의 안정, 후계 체제의 안정을 또 다른 각도로 보면 분단고착화와 뭐가 다른가. 누군가는 대답해야 할 물음이다. 그러나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센터 진징이(金景一) 교수는 “그렇게 보는 것은 근시안적 시각”이라고 반박했다. 김정일 사후 북한에 혼란이 발생하면 덕 볼 나라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가장 큰 불똥이 떨어질 곳은 남한이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북한을 둘러싼 국가들이 하나같이 북한의 혼란을 원하지 않는 것은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북한이 안정돼 스스로 변화에 나설 때 통일 가능성도 생긴다”고 전망했다.

 북한에 극적 변화의 불씨가 싹튼 마당에 독재 정권의 안정을 거들어야 하는 상황은 아무래도 역설적이고 당혹스럽다. 그럼에도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 본다. 급변사태는 아무런 대가 없이 통일을 선물할 수 있나. 정부는 그런 상황을 통제·관리할 각오와 준비가 돼 있나. 만약 그런 위기 국면을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으면 어떡해야 하나. 통제불가능한 혼란을 최소화하는 것이 차선책 아닐까.

 누구도 솔직하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김정일 사후 북한의 체제 안정을 외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이런 현실적 이해타산이 반영됐을 것이라 유추해 본다. 다만 주변국들이 안정을 외친다고 체제 안정을 보장받은 것으로 북한 지도부가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반도 문제를 20년 이상 취재해온 중국의 한 언론인은 ‘중국의 수혈(輸血)과 북한의 조혈(造血)’이란 비유를 동원했다. “외부 수혈만으론 유기체의 생존에 한계가 있다. 스스로 피를 만드는 노력을 해야 장기적으로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정수리를 찌르는 따끔한 일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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