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의 시대에 읽은 실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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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왠지 모르게 바쁘고 어딘지 모르게 우울했던 80년대 초반의 어느 봄, 나는 전혀 엉뚱한 일로 바쁘고 우울했다. 당시 나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였다. 낮에는 지킬처럼 여느 학생들과 똑같은 이유로 분노하고 술에 취하고 욕을 입에 달고 다녔지만, 밤에는 하이드처럼 숨어서 낮의 지킬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소설을 읽고 아무런 관련도 없는 고뇌에 빠졌다.

나를 이중인격자로 만든 소설은 바로 사르트르의 〈구토〉였고, 내게 그 책을 읽도록 한 것은 대학 시절 한상진 선생의 '현대 사회학 이론'과 더불어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경북대 교환교수 신오현 선생의 '현대 철학 사조'라는 강의였다(어디에 계신지는 지금 알지 못하지만, 어눌한 듯한 말투와 늘 적확한 표현을 고르려 애쓰던 선생의 표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실 〈구토〉는--적어도 전반부는--남의 일기를 훔쳐 읽는다는 것 말고는 별로 재미있는 소설이 못되었다. 일기의 주인공 로캉탱에게 주목해야 하는데도 나는 자꾸만 그가 연구하는 역사 속의 인물 롤르봉의 행적에 한눈이 팔려 여러 차례나 그의 내적 변화를 놓치곤 했다.

하지만 당시 나는 그게 내 탓이 아니라 끈끈하고 치밀한 심리 묘사 외에는 특별히 흥미를 끌 만한 '스토리'도 없이 질질 끌고 가는 사르트르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사건'이 없는 소설을 지루하게 여긴다. 모더니즘을 벗어나지 못해설까?). 그게 '잘못'이 아니라 사르트르의 교묘한 '술수'였다는 걸 알게 된 건 중반을 조금 넘겨 읽었을 때였다.

"롤르봉은 나의 협력자였다. 그는 존재하기 위해 나를 필요로 했으며, 나는 나의 존재를 느끼지 않기 위해 그를 필요로 했다. …… 그의 일은 나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그는 나의 삶을 빼앗고 자신의 삶을 내게 제시하는 것이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마치 공포소설을 읽는 것처럼 꼭지가 쭈뼛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전까지 읽은 모든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로캉탱의 장황한 연구--그리고 그에 대한 사르트르의 장황한 언급--는 바로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심혈을 기울였다고 여긴 연구가 기껏해야 존재를 위한 '핑계'로 전락하는 순간의 깨달음은 얼마나 비참한가?

몇 년 뒤에 쓴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그것을 즉자존재라고 이름짓는다. 대자존재인 나는 즉자존재에 나 자신의 존재를 투사하며, 오직 그럼으로써만 존재한다. 더 높은 존재방식으로 존재해야 마땅할 대자존재는 즉물적이고 원시적인 즉자존재에 자신의 존재를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로캉탱이 롤르봉의 연구를 포기하는 것은 바로 그 사실을 안 순간이다.

그렇다면 그때 느끼는 것은 구역질일 수밖에 없다. 로캉탱이 연구하는 롤르봉, 그가 머물고 있는 집의 지극히 일상적이고 속물스럽고 지저분한 인간들, 질식할 듯한 거리의 더러움, 백과사전을 A부터 Z까지 독파하는 독학자,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로캉탱--이 모든 징그러운 '사물들'은 로캉탱에게 구토를 일으키게 한다. 그가 롤르봉을 존재의 수단으로 선택한 것은 애초에 생각했듯 필연이 아니라 전적으로 우연에 불과하다. 그 우연은 뿌리가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본질적인 것은 우연이다. 존재란 본래 필연성이 아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그냥 그 자리에 있다는 뜻이다. …… 이 공원도, 이 도시도, 그리고 나 자신도 모두 근거 없는 것들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속이 메스꺼워지고 모든 게 붕붕 뜨기 시작한다. 그게 바로 구토다."

모든 선택은 내가 하지만(따라서 나는 자유롭지만) 뭔가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필연이 내 목을 조른다(따라서 자유는 비극이다). 존재의 무근거, 이로 인한 자유의 숙명성, 이 매력적인 실존과 부조리의 역설은 당시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나는 그런 나 자신에 대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허우적댔다. 이 엄혹한 시절에 사치스럽게도 실존적인 고뇌라니? 실존 이전에 생존이 문제시되는 시절에.

그러나 그 부끄러움은 착각이었고 결코 사치가 아니었다. 나는 사르트르에 빠져 허우적댄 게 아니라 사르트르의 말에 내 정곡을 찔렸기에 허우적댄 것이었다. 사르트르는 새로운 것을 가르쳐준 게 아니라 내 안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것을 끄집어낼 수 있도록 해주었을 뿐이었다.

나의 모든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말과 행동의 배후에는 로캉탱이 롤르봉을 선택한 것과 똑같은 메커니즘이 자리잡고 있었다. 로캉탱이 롤르봉을 연구하면서--적어도 순간적으로나마--존재의 무근거함을 잊을 수 있었던 것처럼 나는 스스로 유의미한 활동이라고 규정한 것을 통해 내 존재의 빈 구멍을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내 안의 지킬과 하이드를 용인할 수 있게 되었으며, 생존의 시대에 실존을 읽는 게 결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아울러 순수로 버무려진 강철 투사로만 알았던 당시의 인물들이 그 후에 '구토를 일으키는 사물'로 변신하는 모습도 (용인까지는 아니지만) 이해할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은 하나의 부록이다.

남경태 (dimeola@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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