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영생』 vs 『역사의 대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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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오영환
국제부장

김일성 곁에는 채순이라는 간호사가 붙어 다녔다. 응급 의료체계도 갖춰졌다. 채순이는 매일 혈압을 재고, 때론 재롱까지 피운다. 그와 이대천 책임서기는 김일성의 건강을 관리하라는 김정일의 특명을 받았다. 김정일은 전화 교환수도 장악했다. 김일성이 밤 늦게 전화를 연결하지 못하도록 해놓았다. 김일성의 마지막 현지지도인 경제부문 책임일군협의회 실황까지 듣는다. 김일성 사망 때 주치의는 김정일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다. 김정일은 그가 들고 온 사망 원인에 대한 ‘의학적 결론서’에 서명한다. ‘심근경색이 발생되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었다.’ 김정일은 영결식 때의 김일성 영정 사진을 직접 골랐다. 환히 웃는 모습이다. 김정일은 말한다. ‘수령님의 유훈은 앞으로 영원한 지침입니다.’

 김정일 사망 소식을 접하면서 다시 집어 든 북한 소설 『영생』(1997년)의 내용이다. 94년 1~7월 김일성의 말년을 다뤘다. 구성은 허구지만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책은 말년의 김정일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장례 국면의 북한 권부가 어떻게 움직일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책 속의 김일성 사인(死因)은 19일 북한이 낸 김정일 사인과 토씨까지 같다. 20일자 노동신문 1면 김정일 사진도 웃는 모습이다. 김정일 사망 발표문엔 ‘유훈’도 나온다. 현재의 북한 분위기는 17년 전과 그대로일 듯싶다.

 하지만 정세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김정은은 김정일의 전화 교환수까지 통제했을까. 김정일 현지지도 내용을 실시간으로 보고받았을까. 김정일은 권력을 쟁취했고, 김정은은 물려받았다. 김일성의 유일영도체계는 김정일이 확립했다. 김정은에겐 ‘백두 혈통’ 외의 정통성과 독자적 이데올로기를 구축할 시간이 없었다. 그에게 군부 중심의 선군정치는 굴레가 될지 모른다. 경제(효율성)는 어떤가. 자본과 기술은 제자리다. 노력동원에 한계가 있다. 중국에 기댈 수밖에 없다. 친중파가 득세할 수 있다. 말이 유일 ‘영도자’이지 집단지도체제가 불가피해 보인다. 김정일 사망이 남긴 구멍은 너무 크다. 『영생』 출간 즈음에 김정일의 대미 핵외교 업적을 다룬 『역사의 대하』 소설도 나왔다. 김정일이 올 한 해 ‘광기(狂氣)의 역사 청산’ 대하로 들어간 것은 역사의 간계(奸計)인지 모른다. 김정은은 3년 후 『영생 Ⅱ』와 『역사의 대하Ⅱ』를 낼 수 있을 것인가.

 과도기의 북한은 우리에게 도전이자 기회다. 북한 역사상 이런 권력 공백은 없었다. 그 빈 곳을 채우려는 한반도의 거대 게임이 시작됐다. 미·중의 발 빠른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김정은의 연착륙 시나리오를 그리는 북한 권부와 맞장구를 치는 듯하다. 우리에겐 무엇이 요구되는가. 출발점은 김정은 체제를 인정할지다. 그럴 경우 시기와 방식도 중요하다. 북한을 우리가 희망하는 실체로서가 아니라 그대로 봐야 한다. 북한의 3대 세습은 현실이다.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 이를 싫어하고 말고는 태도이지 정책은 아니다. 북한은 무엇을 우리에게 바라고, 또 포기할 수 있는가. 막후 채널을 열어야 한다. Mr.X가 필요하다. 그 문은 그동안의 ‘불신하라, 그리고 검증하라’에서 ‘믿어라, 그러나 검증하라’로 바꿀 때 열릴지도 모르겠다. 그런 다음 정책을 내야 하지 않을까. 새판 짜기는 아무리 신중해도 지나치지 않다.

 내부 정비도 빼놓을 수 없다. 급변사태 다듬기는 국가의 책무다. 정보는 정책과 상황 대처의 원점이다. 국정원과 군의 대북 정보를 더 통합해야 한다. 정보 수장을 외교안보 전략가로 채울 때도 됐다. 정권의 이익이 아닌 국가이익을 밀고 갈 탈(脫)정치·계보의 인물로 말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전진이기도 하다. 외교도 당분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대통령과 실무진의 4강 외교는 다다익선이다. 이명박 정부의 궁극적 평가는 북한 상황관리로 결정될지 모른다.

오영환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