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마지막 좌파 감독의 목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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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세계관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사회주의자였고, 지금도 그렇다." 스스로도 이렇게 말하는 켄 로치는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다를 바 없이 좌파 영화를 만드는 영화 감독이다.

그가 첫 영화를 만든 것은 68년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런던의 한 술집 웨이트리스의 삶을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양식으로 그린 작품〈불쌍한 계집〉이 로치의 데뷔작. 이후에도 로치는 문제작들을 만들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70년대와 80년대 내내 극영화를 만들 기회를 불과 다섯 번 정도 밖에 갖지 못했다.

그런 그의 명성이 만개한 것은 90년대 들어오면서부터였다.〈비밀 아젠다〉로부터 시작된 로치의 90년대 영화들은 거의 모두 비평가들로부터 상찬을 받았고, 그 상당수가 국제 영화제 수상의 영예를 얻었다. 정치적으로는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한 시대에, 그리고 문화적으로는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가 가벼움을 추구하는 그런 시대에, 진중한 정치 참여 영화들을 만드는 로치가 전성기를 맞았다는 사실은 무척 아이러니컬해 보인다. 어쩌면 바로 그것이 좌파 영화의 최후의 보루로서 로치가 존재하는 근거인지도 모르겠다.

좌파 영화답게 로치의 영화들은 다루는 주제나 형식에 있어서 전형적인 리얼리즘 영화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는 30년대 존 그리어슨(John Grierson)
의 다큐멘터리 운동에까지 그 기원이 소급되는, 영국의 오랜 리얼리즘 영화 전통에 따라 노동 계급의 일상적 삶의 결을 카메라로 '기록'하고자 한다. 정치가나 고용주, 또는 기존 체제처럼 힘을 쥔 이들이 가난한 자들을 짓밟는 세상이 영화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건 그 자연스런 결과일 것이다. 그런 영화적 시도들은 때로는 현실적인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를테면 영국 도시의 홈리스 문제를 폭로한 TV용 영화〈캐시 컴 홈〉(Cathy Come Home)
은 정부로 하여금 관련 법안을 개정하도록 촉구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로치가 카메라는 변혁을 위한 효과적인 무기라는 순진한 교리를 추종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텔레비전이나 다른 어떤 매체를 통해 영화가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보나 감정을 보여주고, 이상적인 토론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의 많은 영화들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 IRA 문제를 다룬 정치 스릴러〈비밀 아젠다〉는 보수주의자들로부터 'IRA 선전 영화'라는 비난을 들었고, '반영국적'이라는 이유로 극장측으로부터 상영을 거부당했다. 이런 식의 논쟁은 아마 로치가 바란 바였을 것이다.

로치는 명백하게 좌파적인 원칙을 견지한 '정치영화'를 만드는 감독이지만, 결코 구호 속에 그 주인공들을 파묻어 버리지 않는다. "켄 로치는 사람을 제대로 그릴 줄 아는 감독이다"라는 롤랑 조페의 말처럼, 인간을 풍부하게 묘사할 줄 아는 능력 덕분에 로치는 영화 속 인물들을 메마른 '전형'으로 귀속시키지도 않으며, 또한 자신의 영화를 그저 프로파간다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시킬 위험으로부터도 벗어난다.

그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하층 계급 인물들이 받고 있는 정치적 억압과 동시에, 그들의 인간적 결함, 로맨스, 의지 등도 설득력있게 감싸안는다. 그렇게 해서 로치의 영화는 풍성한 사실감을 얻게 된다. 〈레이닝 스톤〉의 주인공 밥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그가 딸에게 드레스를 사주기 위해 노력하는, 동정할만한 인물이면서 또한 어리석게도 카톨릭적 체면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퇴영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복합적인 인물을 다루기에 영화는 비애감 뿐 아니라 풍자와 유머, 그리고 페이소스도 끌어안게 된다. 그런 로치의 영화들은 정말이지 '인간의 얼굴을 한 정치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 우리가 로치의 행보에서 간파할 수 있는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의 보폭이 한껏 더 넓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즉 30년대 스페인 전쟁의 현장으로 달려갔던 〈랜드 앤 프리덤〉 이후 로치는 투쟁의 목소리를 자신의 조국인 영국 너머에로까지 내지르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예컨대 〈칼라 송〉에서 니카라과까지 날아갔던 그는 최근작 〈빵과 장미〉에서는 미국으로 발걸음을 옮겨 불법 이민 취업자들에게로 카메라를 들이댔다. 로치의 이같은 행보는 국제주의자로서 응당 거쳐야 할 실천으로 보인다.〈랜드 앤 프리덤〉에서 그가 외쳤던 메시지도 결국 "혁명은 전염된다"가 아니었던가.

주요 작품

68년〈불쌍한 계집 Poor Cow〉
70년〈케스 Kes〉
71년〈패밀리 라이프 Family Life〉
90년〈비밀 아젠다 Hidden Agenda〉
91년〈리프 라프 Riff-Raff〉
93년〈레이닝 스톤 Raining Stones〉 (비디오 출시)

94년〈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 Ladybird Ladybird〉(비디오 출시)

95년〈랜드 앤 프리덤 Land and Freedom〉 (비디오 출시)

96년〈칼라 송 Carla's Song〉 (비디오 출시)

98년〈내 이름은 조 My Name Is Joe〉
2000년〈빵과 장미 Bread and Roses〉

Joins 엔터테인먼트 섹션 참조 (http:enzone.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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