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에 대한 회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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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이른바 바캉스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바캉스의 어원은 1936년 역사상 처음으로 자본가에게 유급휴가를 쟁취한 프랑스 노동자들이 전세계적으로 퍼뜨린 말입니다. 그 뜻은 텅 빈 공백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지금도 연 5주 가량의 휴가를 즐기고 있습니다.

노동자뿐만 아니라 고용주도 대통령과 총리 등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상하좌우 눈치볼 것 없이 일을 텅 비우고 휴가를 떠난답니다.(중앙일보 7.29일자 분수대) 그렇습니다. 기계도 쉬지않고 돌리면 고장이 나듯이 하물며 인간임에랴...

그러나 남들 다 쉬는 이 무더운 여름날 쉰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오히려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면서 밤을 낮 삼아 일을 하고 또 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들은 이 땅의 고부가가치 창출의 주역, 황금 알을 낳는다는 애니메이터들입니다.

만약에 애니메이터가 휴가를 떠나려고 하면 어떤 제약이 따르는가 여기에서 한번 열거해 보겠습니다. 일단은 우리나라 최고 성수기가 여름임을 감안해서 읽어주십시오.

첫째-동료들과의 위화감이 조성됩니다.

누군가고 누군 못 가고....(경력이 많을수록 유리합니다) 쟤는 친구 많아서 좋겠다 (바쁜 스케줄로 인하여 멀어진 친구들) 바캉스 비용은? (무급휴가이므로...) 프리랜서라면서도 꼭 허락을 얻어야 됩니다. 스케줄 때문에...

둘째-워낙 일이 넘쳐나므로 내가 놀러가면 그 일을 동료들이 대신해야 하기때문에 동료들에게 미안합니다.

여기에서 일 많으면 좋지 뭘 그러느냐고 한다면 한 일주일쯤 회사 자기책상에서 꼬박,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식사는 배달시켜 먹으면서 철야를 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다 보니 여성노동자들은 누워서도 못자고 책상에 엎드려서 자다보니까 소화불량과 각종 질병에 시달립니다.
저도 약 한달간 신발도 벗지 못하고 꼬박 날 철야를 하다가 드디어 집에 가서 신발을 벗어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물론 말 안해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게을러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게 아니라 철야준비를 하지 않고 어느날 회사에 출근해 보니 일이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있더라는 말입니다. 일을 마치면 또 쌓아놓고 마치면 또 쌓아놓고... 어떨 때는 도망가고 싶어집니다.

셋째-휴가기간에 못번것을 돌아와서 충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수기가 편해집니다.
그러다보니 과도한 노동에 해치는 건강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대강 이런 제약들이 뒤따릅니다.

그리고는 겨울에는 원치않는 휴가를 석달에서 많게는 다섯달까지 얻게 됩니다. 이른바 비수기를 말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만약 성수기때 남들처럼(주제넘게) 휴가를 즐기고 가족을 생각해서 가족과 함께 나들이도 하고 풀장에도 한번쯤은 가고 했다하면 여지없이 그 여파는 비수기때 몰아칩니다.

할 수 없이 택시운전. 막노동, 시간제 아르바이트로 내몰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도저도 아니면, 아니 능력있는 애니메이터라면 회사에 가불을 신청해서 대충 꾸려나가게 되겠지요.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애니메이션에 대한 연구도 그리고 그것을 하기위한 시간과 공간도 없는 것입니다.

자! 일반의 노동자들과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노동자들과는 휴가라는 개념에서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혹시 이런 무서운 생각들을 가지고 있지나 않는지 심히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쓰다 고장나면 버리고 새것 갖다 쓰면 되지!'

'재생산 구조'라는 것을 생각할 때 자본도 재생산구조가 있듯이 노동도 재생산구조가 있는 것입니다. 이 구조가 무너졌을 때 사회는 더이상 발전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노동의 재생산구조를 생각않는 사회는 야만의 사회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 무더운 여름에 하필이면 짜증나는 이런 얘기만 늘어놓을 수밖에 없는 이 땅의 애니메이션 현실이 참으로 우울합니다.

지금도 종묘에서, 서울역에서, 명동성당에서 휴가 아닌 휴가를 보내고 계시는 민주노총산하 노동형제들께 이런 말씀으로 격려를 드릴까 합니다.
"열심히 투쟁하셔서 노동하는 자들의 아름다운 세상이 올 때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애니메이션 노동조합 홈페이지 : http://kat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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