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TV 선정·폭력 '왜 그런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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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냥 가죠. 시청률만 잘 나오면 위에서 아무 얘기없거든요. 반대로 그저그런 아이템 하다가 시청률이 떨어졌다? 이건 용서가 안되는 상황이죠."

한 방송사 오락프로그램 PD의 말처럼, 시청률은 우리 방송가의 '얼굴없는 제왕'이다. 매일 아침 책상 위에 놓여지는 전날 방송 프로그램의 시청률표는 PD들에게 '살생부'인 동시에 '면죄부'다.

종합구성프로그램이라 할 지라도 코너별로 집계가능한 분당시청률의 칼같은 평가는 피해갈 수 없다. 제한된 표본을 대상으로 한 가구당시청률이 프로그램 평가의 유일무이한 잣대가 된 데는 오래전부터 비판이 많았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다. '시청률 제고 방안'을 써내라는 간부회의 독촉도 잦다.

"A급 연예인 나오고, 카메라 앵글 어떻게 쓰면 시청률 올라간다는 건, 웬만한 PD면 다 아는 노하우잖아요?"

'캐스팅 아니면 내용으로 승부해야한다'는 게 이 PD의 프로그램 성공론이지만, 요즘 잘 나가는 연예인 섭외가 좀 어려운가. 그래서 연기나 노래 같은 본업 외에 뛰고, 달리고, 웃음거리도 제공해야하는 각종 버라이어티쇼에는 고만고만 새내기 연예인들이 거푸 등장한다.

캐스팅에서 큰 힘을 얻지 못하면 '내용'이 강해질 수 밖에. "이번에 비키니가 벗겨져서 문제가 된 프로그램도 그래요. 한 번 꺾인 시청률을 뒤집으려면 큰 자극이 필요한데, 여느 코너 하나 키워가지고 주목끌려면 시간이 꽤 걸리잖아요."

최근 TV의 선정성 경쟁에 대해 일선PD들은 "양식의 문제" "속물적인 상술"이라는 말로 비판하면서도 한결같이 '구조적 문제'를 덧붙인다. 시청률경쟁에 내몰린 제작진의 손쉬운 선택이라는 것이다.

"선정성만이 문제가 아니죠. 일본 프로그램 왜 베끼겠어요? 이미 성공한 사례니까, 손쉽게 시청률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보는 거죠."

익명을 요구한 또다른 방송사 PD의 말은 더 냉소적이다. "어쩌다 다큐멘터리 한두편씩 준비해서 '공영성'이라고 내걸 생각은 해도 오락물 연중기획으로 만드는 거 봤습니까? 제작비 빠듯하지, 시간은 없지 그러니까 잘 된다 싶으면 다 따라하는 겁니다. 미국 네트워크 방송사라면 토크쇼 하나에도 작가 20명이 붙어요."

이 PD는 방송사의 시청률경쟁 자제 선언이 매번 무위로 돌아간 점을 지적하면서 "사장단 결의요? 1년 3백65일 매일 한다면 모를까"하고 답한다.

실제 시청률 경쟁은 광고단가 연동제가 실시되면서 한층 심해진 상태. 최근 MBC의 한 프로그램 사무실에는 일본 방송사에서나 볼 수 있던 '시청률 00%돌파'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리기도 했다.

경쟁은 시사·교양프로그램이라고 비껴가지 않는다. 방송진흥원 주창윤연구원은 "한 회 세 꼭지 내보내는 시사프로그램 중 한 꼭지는 10대 성문제·영아유기·매춘같은 선정적 아이템이 빠지지 않는다" 고 비판한다.

하지만 그는 "선정적인 내용으로 시청률을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PD들의 착각"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실제 지난 주말 문제의 가슴노출 장면을 내보낸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시청률은 10%미만(TNS미디어코리아 조사).

그는 지난 6월 이후 과다노출 장면이 늘어난 데 대해 "남들도 다 비키니 차림을 내보내니까, 우리 프로도 안 하면 시청률 떨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심리" 라고 제작진들의 기획력 부족을 지적한다.

10대 후반~20대 후반 연예인이 주로 등장하는 주말 오락프로그램의 주 시청자도 사실 30~40대. 3개 채널의 편성 중복이 무려 50%에 가깝다 보니 '볼 게 없어서 보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주창윤연구원은 "SBS가 먼저 시작하면 MBC·KBS가 따라가는 격"이라면서 공영방송·민영방송의 구분 없이 시청률 경쟁에 나서는 세태를 문제로 꼽는다. 편성정책을 비롯, 방송사의 패러다임 전환없이는 선정·폭력을 낳는 시청률 경쟁의 고리는 끊어질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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