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연 축구협회장님, 문제는 신뢰입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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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호 30면

원래 이 칼럼의 제목은 ‘조광래 감독님, 문제는 신뢰입니다’였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지역 3차 예선에서 한국 축구대표팀은 국제축구연맹(FIFA) 146위인 레바논에 졸전 끝에 1-2로 졌다. 내년 2월 서울에서 열리는 쿠웨이트와의 3차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지면 최종예선에도 못 가고 탈락한다. 설상가상으로 선수단 분위기도 흉흉하고 코칭스태프 사이에도 내분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조 감독이 귀와 마음을 열어 소통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문을 칼럼에 담고 싶었다.

정영재 칼럼

관련 취재를 끝내고 7일 저녁 조 감독과 통화도 했다. 그런데 그날 밤 TV 스포츠뉴스에서 ‘조 감독 경질’이라는 보도가 터져나왔다. 황당했다. 부진한 감독을 경질할 수는 있지만 방법이 잘못됐고 절차도 무시됐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감독의 선임과 경질을 결정하는 곳은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회다. 이번에는 기술위원회가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황보관 기술위원장과 축구협회 부회장 몇 명이 결정했다고 하는데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논리다.

그 때문에 ‘조중연 축구협회장의 정치적인 결정’ ‘대표팀에 거액을 지원하는 후원사들의 압력 때문’이라는 얘기들이 나돈다. 경질 보도 다음 날인 8일 조 회장이 기자회견에 나와 사정을 설명하기로 했으나 회견 30분 전에 취소하고 김진국 전무이사를 대신 내보냈다. 신뢰를 잃어 벼랑 끝에 몰린 조 감독을 경질하는 과정에서 축구협회와 조중연 회장이 더 큰 ‘신뢰의 위기’를 맞고 있다.

조 감독 얘기부터 해 보자. 그는 매우 명석한 사람이다. 경남 명문 진주중과 진주고를 시험 쳐서 들어갔다. ‘축구선수 출신 중에서 미적분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조광래뿐’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돌았다. 선수 시절 ‘컴퓨터 링커’라는 별명으로 사랑을 받았다. 지도자가 돼서는 전술 공부를 열심히 했다.

수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그는 근래 FC 바르셀로나와 스페인 대표팀이 지향하는 ‘아기자기한 패스 축구’에 꽂혔다. 수비 축구와 패스 축구가 결합한 게 바로 ‘만화 축구’다. 선수들은 패스 받기 좋은 공간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다 공격이 끊기면 ‘빛의 속도’로 뛰어내려와 수비를 해야 한다. 선수들 사이에서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플레이를 하라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움직이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불평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조 감독은 대표팀이 소집되면 곧바로 주전과 비주전으로 나눠 따로 훈련을 시켰다. 그는 “어차피 기량은 검증된 거고, 훈련 시간이 많지 않으니 주전 위주로 조직력을 다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소속팀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대표팀에 와서 후보 취급을 당하고, 경기에 뛸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주전의 다수를 차지하는 해외파는 소속 팀에서 경기에 자주 뛰지 못했다. 컨디션이 떨어져 있는데 조 감독이 과도한 주문을 하고 혹사를 시킨다는 불만이 있었다. 최근 기성용(셀틱)이 “구토가 나고 두통이 생겼다”고 하고, 같은 팀의 차두리도 “팀 닥터가 대표팀을 은퇴하라고 한다”고 말한 것도 대표팀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결국 조 감독은 선수가 아닌 자신의 눈높이로 모든 것을 판단했고, 자신의 옷(전술)에 선수가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소통의 부재, 신뢰의 붕괴로 이어졌고,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면 조중연 회장은 어떤가. 그는 지난해 7월 조 감독을 영입하며 큰 박수를 받았다. 라이벌의 측근을 대표팀 수장에 앉히는 ‘통 큰 인사’를 단행해서다. 2009년 축구협회장 선거 때 조 회장과 맞섰던 허승표 피플웍스 회장과 조 감독은 진주 출신에 연세대 축구부 선후배다.

그런데 올해 들어 상황이 바뀌었다. 허 회장이 내년 축구협회장 선거에 재출마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고, 조 감독은 협회 수뇌부와 사사건건 충돌했다. 조 회장의 연임 가도에 조 감독이 복병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런 중에 대표팀은 8월 일본에 0-3으로 참패했고, 지난달 레바논에도 졌다. 최근 축구협회 간부가 한 기자에게 “(조 감독을) 자르려면 지금이 적당하겠지?”라며 반응을 떠보기도 했다. 조 회장의 의도가 드러난 것일 게다.

 만약 내년 2월 한국이 쿠웨이트에 진다면? 1986년 멕시코부터 2010년 남아공까지 이어진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의 자랑스러운 전통이 깨진다. 한국 축구에는 빙하기가 닥칠 것이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조 회장이 말과 행동에서 공정함과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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