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도승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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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승정원(承政院)은 대통령 비서실이다. 여섯 명의 승지(承旨)가 있었는데, 실장 격인 도승지(都承旨)나 나머지 승지·부승지나 모두 정3품이었다. 담당 분야가 따로 있어 좌승지는 호조(戶曹), 우승지는 예조(禮曹), 좌부승지는 병조(兵曹), 우부승지는 형조(刑曹), 동부승지는 공조(工曹)를 담당했고, 도승지는 이조(吏曹)를 담당했다. 품계는 같지만 도승지에게 감히 희언(戱言·농담)하지 못했고, 불경했을 경우 벌로 술자리인 벌연(罰宴)을 베풀어야 했다. 승지를 임금의 목구멍과 혀를 맡았다는 뜻에서 후설지직(喉舌之職)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임금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지 않았다는 점이 지금과 다르다. 임금의 명령을 따르는 승순(承順)도 하지만 임금의 명령을 거부하는 헌가체부(獻可替否)도 했다. 줄여서 헌체(獻替)인데, 임금이 해야 할 일은 진헌(進獻)하지만 그렇지 않은 일은 ‘안 된다’고 한다는 뜻이다. 임금의 전지(傳旨)를 다시 봉해 반납하는 것이 봉환지법(封還之法)이다.

 성종 9년(1478) 흙비(土雨)가 내리고 운성(隕星·별똥)이 떨어지자 대간에서 하늘의 견책이라며 임금이 수성(修省)할 것을 권했다. 그러자 도승지 임사홍(任士洪)은 ‘운성과 흙비는 모두 운수(運數)에 불과하다’면서 수성할 필요가 없다고 성종 듣기 좋은 소리를 했다. 대간에서 “임사홍의 말은 모두 옛 간신의 말”이라고 반격했는데 성종은 대간의 손을 들어주었다. 반면 선조 22년(1589) 승지 윤국형(尹國馨)은 선조의 아들 임해군(臨海君) 등이 남의 재물을 빼앗고 뇌물과 청탁을 받는다고 직언했다가 상주 목사로 좌천되었다. 승정원 서리 수십 명이 그의 말머리에서 절하면서 전별 술잔을 올리면서 “승지로서 수령(?)으로 나가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한탄스럽다”고 위로했다. “사림들이 이 일을 서로 전하면서 미사(美事)로 삼았다”고 『문소만록(聞韶漫錄)』은 전한다. 필자가 『조선왕을 말하다』에서 성종을 그나마 절반은 성공한 군주로, 선조는 실패한 군주로 분류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민심이 현 정권에서 떠난 이유 중 하나가 ‘내가 해봐서 안다’는 만기친림(萬機親臨)형 대통령에게 윤국형처럼 직언하는 승지가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실장을 구한다는데 ‘안 된다’고 말할 사람을 구하라. 중종은 재위 3년 승정원에 붓 40자루와 먹 20개를 하사하면서 “지금 하사한 붓과 먹으로 나의 과오를 감추지 말고(無諱) 쓰라”고 말했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