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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도 마땅한 사람'이란 성립할 수 있는가

중앙일보

입력

20여 년 전 대학입시의 중압감 속에서도 친구들 몇몇과 함께 이른바 '우리식 자유교양'을 했다. 당시에는 자유교양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나 문교부에서 고전 읽기를 반강제로 시행했는데, '우리식'이란 어줍잖은 사춘기의 반항심으로라도 그런 '관제 독서 운동'과 무관하게 고전 읽기를 진행해보려 했다는 얘기다.

요즘처럼 논술고사도 없던 시절, 우리는 제법 그럴듯한 고전 목록을 정해놓고('삼중당문고'와 '삼성문화문고'라는 값싼 시리즈를 중심으로 해서 주변에서 되는 대로 책 제목들을 주워들어 얼추 20권쯤 되는 목록을 만들었던 것 같다) 거창하게 출발했는데, 그 처음을 장식한 고전이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었다. 일정표를 짜지 않은 관계로 둘째 고전부터는 무기한 미뤄졌으니 〈죄와 벌〉은 결국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버렸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죄와 벌〉은 마침 우리 모두에게 처음 접하는 러시아 문학이었다(당시 인기를 끈 것은 톨스토이였는데, 공교롭게도 우리 중에는 '장학퀴즈'에도 흔히 나오는 〈전쟁과 평화〉조차 읽은 놈이 없었다). 그런 탓에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우선 등장인물들의 괴상망측한 이름이었다.

우리에겐 부럽기만 한 신분인 '대학생'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 그가 죽인 전당포 노파 아료나 이바노브나, 우연히 언니에게 들렀다가 함께 죽음을 당한 노파의 동생 리자베타 이바노브나(우린 하나같이 그녀의 죽음을 가장 가슴 아프게 여겼다), 그밖에 집요한 포르피리와 징그러운 스비드리가이로프 등 러시아의 생소한 인명들은 존 레넌,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같은 세련된(?) 영어식 인명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도무지 사람 이름 같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죄와 벌〉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누가 제대로 기억하고 가장 빨리 발음하는지를 놓고 몇 차례 내기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처음 접한 러시아 소설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그 무렵 내가 읽었던 〈데미안〉, 〈어린 왕자〉,〈생쥐와 인간〉등의 서구 소설은 아무리 인간의 어두운 심리, 혹독한 환경, 비참한 가난 등을 다룬다 해도 기본적으로는 '양지'의 분위기였다. 그에 비해 〈죄와 벌〉은 그 두꺼운 책 전체가 지독히도 어둡고 답답했다. 블루스 음악을 즐기던 우리는 〈죄와 벌〉을 '러시안 블루스'라고 불렀다. 그러나 미국의 블루스보다 러시아의 블루스는 훨씬 더 끈적끈적했다.

"거리는 무섭게도 더웠다. 숨막히는 더위, 드문드문 흩어진 밭뙈기, 가는 곳마다 석회, 건축장의 발판, 벽돌, 먼지, 페테르부르크 사람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독특한 여름의 악취 ……" 도스토예프스키가 묘사하는 한여름의 페테르부르크는 우리가 살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고, 몇 페이지씩 장황하게 자기 주장을 펼치는 등장인물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별종의 인간들이었으며, 어머니가 폐병을 앓고 있는 소냐의 집안은 우리가 아는 어느 가정보다 비참한 지옥이었다.

하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19세기 중반의 제정 러시아에서 민중의 삶이 그것과 다르면 얼마나 달랐을까?(물론 황폐한 세도정치의 끝물이었던 당시 조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러나 적어도 내게는 다시 태어난다 해도 조선 상놈의 삶이나 지금 입시지옥의 삶을 택할지언정 7월의 러시아에서는 살고 싶지 않을 만큼 그 분위기는 충격적이었다.

나중에 대학을 졸업한 뒤, 〈죄와 벌〉이 소외된 인간성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휴머니즘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는 일반적인 평을 알고 나서 나는 다시 그 작품을 읽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고등학교 시절에 가졌던 느낌에 압도되었고, 거기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실은 오히려 '더 이상 나아가지 않으려 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작품 후반부를 꿰뚫는 휴머니즘, 특히 창녀인 소냐의 순수하고 성스러운 삶의 자세, 그리고 라스콜리니코프가 그녀에게서 감동을 받아 고뇌하다가 마침내 자수하는 과정을 나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런 결말이 유치하다고 생각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실수요 〈죄와 벌〉의 '옥에 티'라고 여긴다. 감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원래 의도는 그렇지 않았을 거라는 추측까지 해본다. '죽여도 마땅한 사람'이라는 개념은 과연 성립하지 않는 걸까? 그런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과연 정당화될 수 없는 걸까? 그런 나의 생각은 혹시 일종의 인종주의일까, 미시적 파시즘일까?

하지만 나는 오히려 서구적 평등의 개념이 모순에 차 있다고 말하고 싶다(도스토예프스키 역시 서구 문학의 적자라는 사실은 서양사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평등권에 기초한 서구 민주주의 이념 역시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할지 모른다. 물론 〈죄와 벌〉에서 내가 아직도 가장 큰 전율을 느끼는 부분이 바로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 자매를 살해하는 장면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와 전혀 별개의 문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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