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다 말하는 위기론 들으러 여기까지 왔나” 유럽은 핀잔부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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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숲에서는 길이 안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보인다. 이 고비를 넘기면 유럽은 더 강해질 것이다.”

 위기의 한복판에서 이런 말 하기는 쉽지 않다. 웬만한 자신감 없이는 힘들다. 브뤼셀에서 만난 한스 마르텐스 유럽정책센터(EPC) 소장은 “두고 보라. 누구 말이 맞는지…”라며 대세로 자리 잡은 유럽 위기론에 동조하길 거부했다. 위기론에 집착하는 기자에게 “남들 다 하는 말 들으려면 뭐 하러 왔느냐”고 ‘핀잔’까지 줬다. 유럽의 장기 동향을 30년 이상 분석해온 자신의 판단을 믿으라는 충고였다. EPC는 유럽연합(EU)의 대표적 민간 싱크탱크다.

 “이탈리아? 디폴트(국가부도) 안 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이 유로존 평균보다 낮다. 전체 국채의 57%를 국내에서 갖고 있다. 수출경쟁력은 유럽에서 독일에 이어 둘째다. 부채는 많지만 상환 능력이 있는 나라다. 정부에 대한 시장의 신뢰만 회복되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탈리아 총리는 마리오 몬티로 교체됐다. 시장은 새 총리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다.

 남유럽에서 시작된 유로존의 재정·금융위기가 중·서부 유럽을 거쳐 동유럽까지 번질 조짐을 보이면서 유로존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국가신용등급 강등이 우려되는 프랑스의 국가부도 위험은 한국보다 높다. 유럽연합(EU) 자체가 파국을 맞을 수 있다는 극단적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파리 소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폴 반 덴 누어드 수석 이코노미스트도 “유럽의 위기는 정치적 신뢰의 위기”라고 진단했다. 그는 “각종 통계 수치만 놓고 보면 유로존의 디폴트 위험은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며 “정치권의 대응 능력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면서 위기가 실제보다 증폭되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 공인재무분석가(CFA)협회가 파리에서 주최한 ‘2011년 유럽 투자 콘퍼런스’에서 만난 볼프강 문차우 파이낸셜 타임스 칼럼니스트는 “유로존 전체의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80% 선으로 미국보다 훨씬 양호하고, 유로화 가치는 위기 상황에서도 상대적으로 안정돼 있다”며 “유로본드 발행, 유럽금융안정기금(EFSF) 확충, 유럽중앙은행(ECB)의 시장 개입 확대 등 적극적인 위기 해소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브뤼셀=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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