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산책] 파리는 연중 바캉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프랑스에는 '그랑 데파르(대출발)' 란 말이 있다. 본격적인 바캉스 시즌이 시작되는 7월의 첫째 주말에 남부 지중해 연안과 스위스.이탈리아 등 이웃 나라를 향해 국경을 빠져나가는 프랑스 사람들의 대대적인 피서 행렬을 뜻하는 말이다.

프랑스인들은 그동안 법정 휴가 대부분을 7, 8월에 집중적으로 사용해 왔다. 평균 여행일수는 18일.

이 시기가 되면 파리는 외국인들이 점령하다시피 한다. 카페나 지하철에선 영어나 일어를 귀가 따갑게 들을 수 있다.

한국어를 듣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다. 모두 떠나버려 대부분 사무실은 텅 비고, 집에 남겨둔 개와 고양이가 파리 거리로 몰려나와 사회문제가 된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런데 이 유명한 '그랑 데파르' 가 달라졌다. 올해에는 파리를 떠나는 사람이 대폭 줄어든 것이다.

경제가 어려워져서가 아니다. 사실은 그 정반대로 주당 35시간 근로제(유럽은 토요일에도 쉬기 때문에 하루 평균 7시간 근무)가 도입됐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근로자 20인 이상인 사업장의 절반 정도가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약 3백70만 근로자들이 토.일요일과 공휴일을 빼고도 연간 35~40일간 휴가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휴가 기간이 이렇게 늘어나다보니 여름 바캉스 때가 아니라도 토.일요일을 끼고 앞뒤로 하루씩 휴가를 내 아무 때나 며칠간씩 토막 여행을 떠나는 게 다반사가 됐다.

이를 뒷받침하듯 올 1분기 여행사들이 마련한 2박3일 여행 상품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3%나 늘었다.

이같은 추세에 발맞춰 프랑스 국영 항공사인 아에로프랑스는 이달 14일부터 금요일 아침에 출발, 월요일 밤에 돌아오는 항공편을 파격적으로 할인하는 기획상품 판매에 나섰다.

유례없는 호황으로 대부분 직장인들의 주머니가 두둑해진 것도 한 이유다. 지난달 프랑스 자동차 판매량은 지난해 6월에 비해 75%나 늘었다.

물론 여행이 절정을 이루는 것은 여전히 여름이다. 하지만 통계를 보면 프랑스인들의 올 여름 바캉스 일수는 12일로 줄었다.

여름에 쓰지 않은 나머지 기간에다 늘어난 휴가를 덧붙여 토막 여행을 여러번 더 하겠다는 계산인 것이다.

사회학자 앙드레 로슈는 "35시간 근로제가 프랑스인들의 집단적 바캉스 행태를 완전히 바꾸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쉬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휴가를 얻어 여행을 떠난다" 고 말했다.

1년에 고작 1주일, 길어야 2주일을 넘지 못하는 휴가에 감지덕지해야 하는 한국 근로자들에게는 아직 먼 나라 이야기다.

이훈범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