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애국과 매국의 두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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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릴 적 동화의 세계는 조화롭고 평화로웠다. 흥부와 놀부, 친엄마와 계모, 문명인과 야만인, 국군과 공산군, 한국과 일본... 세상은 좋은 나라 혹은 우리 나라와 나쁜 나라 혹은 남의 나라로 양분되어 있었고 언제나 좋은 나라가 궁극적인 승자였다.

동화는 대학시절까지 이어져서 박정희에서 전노 일당에 이르는 지배층은 별 망설임 없이 나쁜 나라였고 좋은 나라는 좀 막연하지만 민중이라고 부르는 아련한 추상이었다. 물론 나 자신은 언제나 '당연하게' 좋은 나라팀 소속이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어떤 기준으로 좋은 나라, 나쁜 나라가 나뉘는지, 그런 구분이 온당한 것이기나 한지 그 어떤 선생님도 토론시켜 주지 않았다. 편가름은 무오류의 진리와도 같아서 개인의 사회화 과정에 문답 없는 필수 항목이었다.

헌데 어라, 좋은 나라가 왜 좋은 편인지 반대편은 왜 악하거나 열등한 쪽인지 한 10초 정도만 생각해도 헷갈리기 시작하는 일들이 있다. 가령 남성과 여성, 경상도와 전라도, 기업가와 노조, 기득권층과 시민단체...

그러니까 고정관념이란 현존질서를 지탱해 주는 버팀목 같은 것이다. 빨갱이가 나쁜 나라여야만 간신히 체제가 유지되던 시절이 있었고,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해야만 하고 연장자가 연소자보다 항상 우월해야만 돌아가는 지배 시스템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젠 누구나 패러다임 쉬프트를 외친다. 발상의 전환! 변해야 산다! 그런데 그런 총론적 지향에 비해 각론적인 내용성은 충실한가. 자기 자신은 항상 '주관적으로' 좋은 나라 편에 소속시키는 편리하고 이기적인 관성에도 반성적 인식이 가능한가.

윤덕한의 〈이완용 평전〉(출판사 중심)을 읽으며 놀란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이완용의 모습이 계속 드러나" 집필과정에서 큰 혼란에 빠졌다는 저자의 토로가 실감날 만큼 우리의 상식은 부실했다.

"그는 술도 여자도 모르고 시문과 서예를 낙으로 삼은 전형적인 조선 선비였고 조선왕실에 끝까지 충성을 바친 충신"이었다는 것이며, "독립협회의 회장으로서 전체 존속기간의 3분의 2 이상 동안 사실상 독립협회를 이끌었으며 독립문의 현판조차 그의 글씨일뿐더러 이 땅에 의무교육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해 법제화한 인물도 그"였다. "을사조약의 실제 책임자는 을사5적이 아니라 명백히 고종"이라는 사료의 규명을 통해 저자가 제기하는 음모론과 희생양적 시각은 '만고의 역적'에 대한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여실히 흔든다.

우리를 편안하게 잠재워 왔던 동화의 세계는 어서 깨져야 한다. 인식하지 못하고 악행에 가담하는 무반성적 태도, 외면과 무지 속에 가려진 진실들, 현상고착을 위해 개발된 각종 허구의 논리들. 〈이완용 평전〉은 그에 대한 하나의 반면 사례집 같다. 이제 관심은 역사에서 당대의 현실로 옮겨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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