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맹이 '안티사이트' 들고 싸워 이겼다

중앙일보

입력

입주한 아파트의 부실 시공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공급자인 삼성물산측에 리콜을 요구했지만 이를 거부하자 이기봉씨는 지난 2월 인터넷에 안티 사이트를 개설,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네티즌에 알리기 시작했다.

사이버 소비자운동의 새 장

지난 6월 28일 서울지법 민사합의 50부(재판장 박재윤 부장판사)는 대기업 등으로부터 입은 피해를 네티즌에 전파하는 ‘안티(anti) 사이트’ 운영은 위법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이제 인터넷은 무한한 정보은행은 물론 사이버 소비자운동의 신문고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원의 이번 결정으로 홈페이지(http://membe rs.tripod.co.kr/psalter7) 운영을 계속할 수 있게 됐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니까요.”

안티 사이트 운영으로 기업 이미지가 크게 훼손 당했다면서 삼성물산이 낸 ‘비방 등 금지 가처분 신청’에서 승소한 이기봉씨(40)는 그러나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원만하게 문제가 해결되기를 담담하게 기대할 뿐이다.

“한 때 삼성전자에 근무했던 삼성인의 한사람으로서 힘의 논리를 앞세운 삼성물산의 횡포가 법에 의해 제지를 받은 만큼 조속한 문제 해결이 뒤따랐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그는 삼성전자에 근무하던 지난 93년, 근로자의 꿈이기도 한 내집 마련을 위해 삼성물산이 공급한 수원의 한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그런데 이 아파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 벽, 거실 천장 등에 곰팡이가 심하게 피는 등 부실 시공의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해마다 보수 공사를 받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마침 개인사정으로 이사를 하게 된 그가 집을 내놓았지만 시커멓게 곰팡이가 피는 집을 사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삼성물산에 리콜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삼성물산은 그러한 선례를 남길 수 없다며 저의 리콜 요구를 거부하고 수박 겉핥기식 하자 보수만 계속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분개한 이씨가 삼성아파트의 문제점을 폭로하기 위해 안티 사이트를 만든 것은 지난 2월. 인터넷을 전혀 사용할 줄 모르는 넷맹인 이씨는 PC방 20여 곳을 돌아다니며 안티사이트를 만들어줄 대학생을 찾았다. 마침 한 학생의 도움을 받아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사이트를 통해 억울한 사정을 네티즌에 알리기 시작하자 방송국 등 언론사에서 취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협상을 하자며 다가서던 삼성물산이 지난 4월 느닷없이 이기봉 씨를 상대로 가처분신청을 냈다.

삼성물산은 이기봉씨가 작은 문제를 빌미로 무리한 요구를 하다가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안티 사이트를 통해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다면서, 이씨의 홈페이지 게시물을 삭제해달라고 법원에 소를 제기하였다. 하지만 그는 부실 시공으로 시비가 끊이질 않는 자신의 아파트를 시세대로 구매해달라고 요구했을 뿐 결코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았다면서 자신의 안티 사이트는 대기업의 횡포에 대한 정당한 항거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법원은 이씨가 그 동안 삼성물산을 계속 비난하거나 곤경에 빠뜨리는 행위를 한 사실이 인정되지만 누구나 자신의 의견·주장을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는 데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대기업의 영업 활동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올림으로써 네티즌 사이에 자유로운 토론의 장을 여는 것을 무조건 금지할 수는 없다며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소송도 변호사 없이 혼자서 진행해 승소했지만 그의 표정이 밝은 것만은 아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안티 사이트 개설이 정당하다는 판정을 받았을 뿐 삼성물산이 그의 구매 요구를 수용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남은 문제는 소비자의 정당한 권리 주장에 대한 기업체의 당연한 수용 자세 회복이다. 일본의 안티 도시바 사건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고객의 정당한 권리를 거부하는 기업체는 결국 그 앞날이 밝지 않기 때문이다. 고객은 왕도 아니지만 결코 봉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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