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추억의 그라운드 - 김재박.上(야구의 시작과 학생시절 外)

중앙일보

입력

안녕하십니까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주역 조인스닷컴이 야심찬 기획으로 선보이는 ‘추억의 그라운드’를 담당할 홍성욱 입니다.

평소 동경하거나 추억속에 묻혀있던 야구인들을 취재일선에서 만나게 될 때의 그 감회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하죠.

조인스닷컴을 찾아주시는 많은 올드팬들과 야구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의 요청과 성원에 힘입어 그라운드를 떠난 한국의 스타플레이어를 찾아서 그들의 뒤안길과 근황을 알아보고 뉴미디어의 장점을 십분 활용, 동영상과 함께 서비스 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

아울러 여러분들의 모든 의견과 제보는 제 이메일인 jshsu@joins.com으로 접수합니다. 독자여러분과 함께 만들어 가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의 코너로 계속 이어지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추억의 그라운드를 만들어갈까 합니다.

김재박(金在博)

1. 야구의 시작과 학생시절.

김재박. 그는 54년 대구에서 출생한 경상도 사나이다. 경북중학교 때 야구를 시작하며 처음 만난 스승은 다름아닌 서영무감독(작고). 삼성의 초대 감독을 역임하는 등 대구 야구의 ‘대부’로 불린 서감독과 김재박의 만남은 행운이자 불행이었다.

김재박의 야구인생에 전환점이 된 두 차례의 ‘설움의 기차’를 탄 신호탄이 된 까닭이기 때문이다. 경북중 시절 작은 체구와 눈에 띄지 않는 플레이는 결국 명문 경북고의 진학명단에 누락되며 유니폼을 벗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은 있는 법’. 그의 강한 어깨는 서울행 열차를 타게 했고, 풍운의 꿈을 안고 대광고 야구부의 창단멤버로 진학한다.

대광고 시절 김재박은 전천후 플레이어였다. 내외야는 물론이고 투수에다 포수까지 맡아가며 종횡무진 활약했다. 게다가 그의 빠른 발은 대광 야구 발전의 선봉 역할을 했다. 2학년때인1971년 봉황기 고교야구 준우승의 기염을 토한 것. 하지만 ‘반짝활약’은 그가 원한 서울소재 대학의 스카우트제의와 연결되지 못했고, 그는 또 한번 ‘설움의 기차’를 타야 했다. 이번엔 다시 대구로의 낙향이었다.

영남대 야구부 1기생. 그의 새 출발은 배성서 감독(빙그레 감독 역임)과의 인연으로 열매를 맺게 된다. 배감독의 지론은 무조건 훈련 또 훈련. 거기에 러닝과 웨이트를 강조했다. 뛰고 또 뛰며 김재박의 야구인생은 성큼성큼 앞으로 전진하게 된다. 대학 2학년이던 74년 추계연맹전 타격왕이 된 김재박은 75년 태극마크를 달고 아시아선수권에 나가 우승의 주역이 된다.

2. 7관왕의 신화

76년 11월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의 창단멤버로 입단한 후 이듬해 전무후무한 7관왕에 오르며 한국야구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신인왕은 당연지사였고 타격(.439),홈런(13개),타점(37타점),도루(24개)에다 당시 있었던 3관왕상까지 휩쓸며 MVP에 오른 것. 이 때야말로 ‘야구=김재박’으로 통한 시절이었으니 ‘인생은 노력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진리’를 확실하게 보여준 셈이다.

김재박은 야구를 시작하며 줄곧 등번호 7을 달았다.(군복무때만 44번) 행운의 ‘럭키세븐’. 그 행운은 77년 7관왕으로 찾아온 것이다. 게다가 니카라과 슈퍼월드컵대회에 국가대표로 참가해 타격왕(.426)에 등극하면서 국제무대에 이름 석자를 신고하기 까지 했으니. 그의 생애 최고의 해로 남을법하다.

그는 공군에서 군복무를 했다. 지금은 상무(국군체육부대)에 전군의 체육선수가 모여 있지만 당시는 성무(공군)와 경리단(육군)으로 나뉘어 있었다. 김재박이 성무에 있을 무렵 신중국 감독이 이끄는 공군의 전력은 국가대표와 다를 바 없었다. 1번 김인식 2번 김정수 3번 김재박 4번 김유동 5번 천보성… 말이 필요 없는 최정예 부대였던 것. 이때부터 김재박의 야구인생은 우승을 동반하는 승리의 삶으로 변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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