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서 '조화로운 삶' 찾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또 스콧 니어링과 그의 부인인 헬렌이 함께 쓴 〈조화로운 삶〉(보리)도 관심을 끌고 있다. 97년에 나온 헬렌의 회고록〈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보리)도 함께 눈길이 간다.

도시를 버리고 버몬트 숲이라는 시골로 떠난 스콧과 헬렌 부부. 한 해의 삼분의 일은 노동을 하고, 또 다른 삼분의 일은 무조건 쉬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자기를 재충전하기 위해 독서와 글쓰기 등에 몰입한다는 삶의 원칙을 실행에 옮긴 스콧과 헬렌.

'소주 한 잔 하자'는 이야기를 사람을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전화할 때마다, 또 이메일의 맨 끝마다 어김 없이 하긴 하지만, 넉넉하게 소주 한 잔 할 시간을 찾지 못하는 생활. 한 주 내내 무척 바쁘게 생활하다가 주말이면 어김 없이 연천의 통나무집을 찾아가는 가까운 선배가 생각났다. 스콧 니어링의 책들이 나오기 전부터 스콧과 헬렌을 이야기하던 그 선배의 통나무집 앞마당에 밤새 모닥불을 지펴놓고 '진정 조화롭게 산다는 게 무언가' 하는 이야기를 오순도순 나누고 싶었다.

술 한 잔 나누며 이야기하자는 제안에 '무조건 좋다'던 선배는 그러나 조인스닷컴에 실명과 함께 오디오와 사진이 올리겠다는 내 생각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건 어쩌면 내쪽에서 더 머뭇거린 문제였다. 조인스닷컴의 경쟁사에서 녹을 받고 있다는 이유였다. 자본주의의 운영 방식은 사람 관계의 조화조차 불편하게 했다. 공연히 평온한 삶의 조화를 깨뜨려 죄송스런 마음이 남았다.

★ "플레이 키를 한 번 더 눌러야 해요."

두 다리를 다 쓰지 못해 목발을 짚고 좁은 논두렁 사이를 능숙하게 오가면서 귀농의 꿈을 키우는 전국귀농운동본부 출판기획실장 안철환 님이 생각났다. 그는 지난 해 경기도 안산 귀퉁이에 4백평짜리 밭을 마련하고 농사를 짓고 있다. 언제나 천진무구한 웃음기를 달고 사는 그는 힘든 걸음걸이이지만 늘 나보다 한 발 앞서 나가는 오랜 벗이다. 자연을 향한 걸음 역시 나보다 한 발 빨랐다. 아니 나는 쫓아가지도 못할 걸음걸이였을 지도 모른다. 목발 집어던지고 온 밭을 기어다니며 누리고 있을 그의 '자유'가 그리워졌다.

"서울 어디에서 내가 땅바닥을 기어 다닐 수가 있어? 하지만, 형도 내 밭에 와서 내가 밭 일 하는 거 보면 놀랄 거야. 나도 사실은 처음에 '이 몸으로 내가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있었어. 그런데 요즘은 할 만 하고, 참 좋아."

자기 생긴 만큼만의 자유를 누리겠다는 안철환 님의 서울 나들이 시간을 조금 앞당겨 목동의 오피스텔에서 만났다. 목발을 짚은 그의 발걸음은 무척 힘들어 보였지만 늘 그렇듯 표정은 환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 "플레이 키를 한 번 더 누르란 말이에요."

그이와의 나눔의 자리는 MD라고 불리는 디지털 녹음기에 그이의 천진무구한 음성을 담는 데에서부터 시작했다. MD를 전해주기 위해 후배가 급하게 목동의 오피스텔까지 찾아왔다. 그가 전해준 기계는 처음 다루게 되는 일본산 신기종이었다. 다른 스케줄 때문에 정신 없이 바쁜 와중에 목동까지 찾아오느라 후배의 숨은 목에 차올랐다. 길가에 서서 MD 작동법을 간단히 가르쳐 주고 그는 다음 행선지로 서둘러 떠났다.

언제나 우리는 '목발 내던지고 기어다닐 수 있는 자유'를 찾을 것인가. 분명 뼈와 살로 된 '나의 다리'이건만, 자유보다는 시간과 노동에 속박돼 혹사당하는 나의, 그리고 우리들의 다리여!

플레이 키를 다시 누르기 직전까지의 과정은 후배가 가르쳐준 대로 잘 했다. 거기까지 해낸 스스로를 신통해 하다가 플레이 키를 눌러야 된다는 걸 잊었다. 스탠바이 상태로 2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녹음이 잘 되라고 마이크를 이리저리 옮기기까지 하며.

★ "플레이 키를 한 번 더 누르지 않으면 그냥 스탠바이 상태일 뿐이에요."

"농사는 잘 돼?"라는 질문으로 그를 맞이했다. 아직은 전업 농부가 아니다 보니, 그다지 스트레스 받을 일이 아니라며, 재미있다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나중에 어느 정도 수확을 거두게 될 지는 몰라도 요즘은 시간만 나면 장인 어른과 둘이서 밭에 나가는 재미로 산다는 것.

- <조화로운 삶>에 보니 스콧 니어링은 처음에 도시 안에서 자신이 꿈꾸는 공동체를 실현해보려고 애쓰더구나. 그런데 도시의 모든 것은 자본주의적 경영의 집적물인 까닭에 할 수가 없었던 거지. 결국 버몬트 숲이라는 시골을 찾아들어가잖아. 넌 어때. 농사 짓기에 좋은 몸도 아니면서 어떻게 시골로 갈 생각을 한 거야?

"난 스콧 니어링과 달라. 도시는 나같은 장애인들이 살기에 장애가 많아. 다들 짐작이야 하겠지만, 특히 우리 나라는 장애인이 살기에 정말 불편하거든. 도시는 규격이 지배하는 곳이야. 니어링 식으로 이야기하면 자본주의적 규격이라고 해도 될 거야. 장애인이 그 규격에 맞추어 살아간다는 건 힘들어."

- 농사에는 규격이 없어?

"농사는 자연 속에서 하는 일이잖아. 자연은 달라. 규격이란 게 끼어들 자리가 없어. 그냥 못 생기면 못 생긴대로, 잘 생겼으면 잘 생긴대로 그냥 그 안에 파묻혀 사는 거야. 형은 농사가 어려울 것 같아서 귀농하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하지만 내가 밭일하는 거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걸. 난 밭에서 그냥 기어다니면서 일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시간이 좀더 걸린다는 것 외에는 다를 게 아무 것도 없어. 규격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걸 거야. 도시에서는 기어다니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기도 하고, 혹시 있다고 해도 걸어다니면서 일하는 사람들과 차이가 너무 크잖아. 니어링이 생각한 자연공동체라는 것도 자기 생긴 만큼, 꼭 필요한 만큼만 일하고 나머지는 그냥 편안하고 자유롭게 생활하자는 거 아냐?"

- 니어링은 그렇게 편안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위해서 몇 가지 원칙을 정하지. 무슨 일을 해도 서두르지 말자는 그는 오전 중에 열심히 일을 했다면 오후에는 자유 시간을 가져야 한다(<조화로운 삶> 59쪽 참고)는 거야. 게다가 '해마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시간을 여섯 달로 줄이고 나머지 여섯 달은 여가 시간으로 정했다. 여가는 연구, 여행, 글쓰기, 대화, 가르치기 들로 보냈다'(같은 책 8쪽)고까지 하잖아. 이게 얼마나 환상적이야. 다들 이렇게 살고 싶은 거잖아.

"물론 나도 밭일 하는 시간 외에는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취재(참고:안철환 님은 귀농을 주제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취재해서 그들의 삶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으며, 농사 일과 관련된 책들을 기획하기도 한다.)도 하지. 그러나 니어링처럼 칼로 자르듯 네 시간 일하고 네 시간 놀기로 정하는 것은 쉽지 않아. 게다가 일년을 절반으로 토막내서 일하고 놀 수 있을까?"

- 니어링은 버몬트 숲으로 들어가기 전의 도시 생활에서 많은 활동을 하던 사람이잖아. 중년까지의 자기 활동을 한꺼번에 버리고 새로운 일만을 할 수는 없었겠지. 그러다 보니, 농사도 짓지만, 아울러 집필, 연구, 글쓰기 등 먹물들이 하는 일을 병행해야 했던 것 아니겠어?

"농사는 그렇게 끊어지는 게 아니거든. 일은 계속 이어져. 내가 아직 서툴러서 그런지 몰라도 네 시간 일하고 마칠 수가 없어. 일단 시작하면 계속 하게 돼. 그런데 그게 나로서는 다 즐거운 일이거든. 일과 놀이가 하나라고나 할까."

- 그건 네가 전업 농부가 아니기 때문일 거야. 내가 체험한 것이 아니어서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만일 농사를 통해서 자기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면 농사는 곧바로 자본주의 시장 체계에 편입돼야 한단 말이지. 즉 농사를 통해서 잉여 생산물을 반드시 내야 한다는 거지. 스트레스 아니겠어? 그런 속에서 어떻게 농사를 놀이처럼 즐겁게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니어링이 이야기되는 거야. 니어링은 자본주의의 체계를 거부하고 있잖아. 그래서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생산하겠다는 거지. 무슨 일이든 서두르지 않고 한다는 게 그래서 가능한 거고 말야.

"나도 그런 생각은 해. 자본주의 시장 체계로부터 벗어나는 게 우선되겠지. 내가 니어링과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게 자식이 없다는 거야. 우리나라에서 생계비 중 가장 많이 드는 게 자녀 교육비라고 하잖아. 나는 그게 안 들어서 한 달에 60만원 정도면 생활할 수 있거든. 변산에 가면 정경식 선생님이 살고 계셔. 니어링 보다 훨씬 훌륭한 분이야. 그 분은 교육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을 가지셨지. 학교 교육이라는 게 고작 '자연을 어떻게 하면 멀리 하고, 가만히 책상 머리에 앉아서 볼펜이나 굴리나하는 잔꾀를 가르치는 곳'이라고 규정하고, 애들 교육도 다른 방식으로 시키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 교육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귀농을 결행하지 못하잖아. 그런 점에서 많은 걸 가르쳐 주는 거지."

- 니어링은 시골로 가서 자기 집을 손수 짓더구나.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 자기가 살 집을 자기 손으로 짓는다는 걸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 나도 지금 우리 밭에 집을 짓고 있어. 물론 오래 걸리겠지. 나는 몸이 이래서 내가 다 할 수는 없어. 그래서 친구들 불러서 쏘주 한 잔 멕이고, 돌 하나 쌓으라고 하는 식이지. 그렇게 해서 지금 구들까지는 지었는 걸. 형도 와서 내 집 좀 지어."

- 난 가서 돌은 안 쌓고 쏘주만 얻어먹으면 안 돼?

"하하하."

- 처음에 그 시골에 들어갔을 때는 어땠니? 니어링이 처음 버몬트 숲으로 갔을 때 이웃들은 그를 반기지 않았던 모양이더라. 니어링 부부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던 거지. 그러다가 나중에는 그들 방식의 삶을 인정하면서 가까워졌대.

"나는 귀농학교 등에서 배운 농사법을 쓰잖아. 이를테면 밭에 다른 사람들은 비닐을 깔아두는데, 나는 비닐이 아니라 신문지를 깔거든. 비닐 아래에서는 무당벌레니 거미 따위의 익충들이 살 수가 없는데, 신문지 아래서는 잘 살아. 그래서 내 밭에는 다른 사람 밭에 다 있는 진딧물이 없어. 이웃 사람들이 내 밭을 보고 여러 가지를 물어 온단 말야. 난 그 사람들에게 내가 아는 걸 이야기해 주기도 하고, 토론도 하면서 더 좋은 농사법을 찾아가지. 그러면서 농사 공동체라 할까, 그런 게 자연스럽게 만들어져."

- 또 재미있는 건, 도시의 친구들이 니어링을 많이 찾아갔었나보지? 니어링은 그들을 도시 음식으로 대접하지 않고, 시골 음식으로 대접해. 처음에는 낯설어 하던 사람들도 차츰 니어링이 내놓은 음식의 귀중함을 알게 되더구나.

"공동체라는 게 그런 것 같아. 굳이 다닥다닥 붙어 살아야만 공동체는 아닐 거야. 매일 얼굴 마주하며 사는 것보다는 약간 멀리, 그리움이 생길 정도의 거리로 떨어져서 사는 게 좋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해. "

★ "플레이 키를 한 번 더 눌러야 녹음이 시작되는 거예요."

온 지구를 헤드폰으로 뒤덮었다는 일본 전자기기 회사의 녹음기가 스탠바이 상태인 채로 1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니어링 부부의 책 <조화로운 삶> 이야기를 하자던 애초의 생각과 달리 두 다리를 다 못 쓰면서도 힘든 농사일에 빠져 사는 농사꾼 안철환 님의 농사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이에게 다음 스케줄만 아니었다면 더 잡아놓고 이야기를 더 들어야 하는데 아쉬웠다.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그는 한 마디 덧붙였다.

"스콧 니어링 이야기를 많이들 하는데, 난 불만이야. 물론 스콧 니어링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걸 부정하는 건 아냐. 하지만 우리 안에도 그만큼 훌륭한 분들은 충분히 있는데, 왜 우리 사람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외국 사람들만 이야기하느냐 이거야. 생각해 봐. 생태농업이니 환경보호니 자연주의니 많은 이야기들을 하는데, 형이 생각나는 책들을 이야기해 봐. 그게 다 외국 책들 아니야?"

그는 자신과 공저로 돼 있는 정경식 님의 <21세기 희망은 농(農)에 있다>(두레)라는 책의 속 표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내주었다.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까지 들먹였다.

"소로우의 <월든>은 이야기를 많이 해도, 우리 나라의 시골에서 자연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 이야기는 하지 않잖아. 우리 나라 사람들 이야기는 책도 안 팔리잖아. <월든>이야 세계적으로 알려진 훌륭한 책이지. 그걸 부정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우선 우리 것부터 찾아내는 게 순서 아냐?"

★ "플레이 키를 한 번 더 누르라고 내가 분명히 이야기했잖아요."

<스콧 니어링 자서전>이나 <조화로운 삶>이 잘 팔리는 데에 불만을 털어놓고 목발을 짚고 오피스텔을 나서는 그이와 주차장까지 갔다. 자연 속에서 새로운 삶의 조화를 찾아내려는 목발 짚은 농사꾼의 아름다움 위로 이 땅의 자본주의 규격에 맞추어 살아야만 하는 우리네의 삶에 대한 안쓰러움이 겹쳐졌다.

★ "플레이 키 말이에요. 플레이 키."

"그냥 내버려 둬. 나도 내 맘대로 할 거란 말야. 마감 시간 넘겼는데, 오디오 없이 쓰면 되잖아. 안달복달하지 말잔 말야."

고규홍 Books 편집장 (gohkh@joins.com)

▶ 이 글에서 이야기한 책들
*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 (스콧 니어링 씀, 김라합 옮김, 실천문학사)
*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헬렌 니어링 씀, 이석태 옮김, 보리)
* <조화로운 삶> (헬렌 니어링 스콧 니어링 함께 씀, 류시화 옮김, 보리)
* <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씀, 강승영 옮김, 이레)
* <21세기 희망은 농에 있다> (정경식 안철환 함께 씀, 두레)

▶ 이 글을 보며 가볼 만한 사이트
* 전국귀농운동본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