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먼저 떠나면 아이들은...”아버지들의 마음을 적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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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호 05면

영화 ‘비우티풀’은 한 곡의 음악에서 비롯됐다. 2006년 미국 LA에서 텔루라이드(Telluride) 영화제가 열리는 콜로라도주로 차를 몰던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바벨’ ‘21그램’ ‘아모레스 페로스’ 감독)는 CD 한 장을 틀었다.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G장조였다. 뒷좌석에 앉아있던 그의 두 아이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 곡이 가진 우울한 분위기와 슬픔, 아름다움에 아이들은 압도돼버렸다. 아이들은 그걸 받아들이거나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느낄 뿐이었다.”
몇 달이 흐른 아침, 그는 이 CD를 무심코 다시 플레이어에 걸었다. 식사 준비를 거들던 아이들은 음악을 멈춰달라고 했다. “아이들은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의 정서적 충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한 인물이 내 머릿속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안녕, 내 이름은 욱스발이야.’ ”

이냐리투 감독 네 번째 장편영화 ‘비우티풀’

두 아이를 남겨두고 죽음을 맞아야 하는 아버지 욱스발의 이야기 ‘비우티풀’은 그로부터 3년 후 완성됐다. 아이들의 가슴을 헝클어뜨렸던 2악장 아다지오 아사이(Adagio assai, 매우 느리게)는 욱스발(하비에르 바르뎀)의 테마곡으로 쓰였다.

“영화를 만들기에 앞서 영화를 듣는다”는 이냐리투의 네 번째 장편 ‘비우티풀’은 테마곡처럼 슬픈 질문을 느리게 던진다. 한없이 어둡고 절망적인 세상에 자식들만 홀로 남겨놓고 떠나야 한다면? 욱스발은 전립선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별거 중인 아내 마람브라(마리셀 알바레스)는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어 아이들을 맡기기엔 불안하다. 어린 두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아버지는 미칠 듯한 심정이 된다. 바르셀로나 뒷골목에서 불법 체류자들을 공장에 알선하는 일로 먹고사는 그는 사자(死者)와 교감하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그 특별함은 석 달의 시한부 인생을 더욱 끔찍하게 만들 뿐이다.

‘비우티풀’은 모호하고 덩어리져 있는 느낌으로 한 남자의 절망을 전한다. 결코 단선적이지 않은 줄거리를 좇아가는 데 하비에르 바르뎀이라는 ‘괴물급’ 배우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 남겨진 자에 대한 연민, 불행과 구원 등 관념의 덩어리들이 한 사람의 배우를 통해 육화(肉化)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꽤나 신비로운 경험이다. ‘촬영장의 두 완벽주의자’로 유명했던 이냐리투와 바르뎀은 “두 운석이 충돌하는 것 같았다”는 바르뎀의 회상처럼 영혼의 쌍둥이 같은 작업을 해냈다. 바르뎀은 이 작품으로 지난해 제62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아버지와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비우티풀’의 한 줄기라면, 다른 한 줄기는 전지구적이 되다시피 한 양극화와 빈곤의 문제로 뻗어간다. 욱스발이 사다준 싸구려 가스난로 때문에 짝퉁 명품 공장 이주노동자들이 질식사하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이냐리투는 “인간 벌집에서 죽어가고 착취당하는”, “현대판 노예들의 힘든 일상을 보여주기 위해” 관광지 그림엽서 같은 풍경 대신 이민자 거주지인 엘 라발(El Raval)을 택했다. 영화의 무대가 가우디 건축물과 화려한 색채로 유명한 바르셀로나라는 사실은 선뜻 믿기 힘들다. 두 가지 줄기는 서로 덩굴처럼 얽히고 설키면서 이 모호하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영화의 크기를 키운다.

아마도 이 영화를 봤을 때 가장 감정의 진폭이 클 사람은 어린 자녀를 둔 중년의 가장일 것이다. 그건 불치병으로 먼저 세상을 버려야 하는 아버지의 애절함에 감응해서일 테지만, 더 근원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아이들을 남겨두고 가야 하는 이 세상이, 가엾은 아버지 욱스발이 물려주고 싶어하는 ‘비우티풀한’ 세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 아닐까. 이냐리투는 이 영화에 대해 “(음악으로 치면) 레퀴엠(진혼곡)에 가까운 어떤 것이 됐으면” 했다고 한다. 가슴을 할퀴는 한 곡의 음악에서 비롯된 ‘비우티풀’은 사랑하는 이들을 남기고 떠나는 자들의 마음을 달래며 끝난다. 해피엔딩만이 구원은 아니라는 사실을 곱씹게 하면서.

서울 CGV무비꼴라쥬(강변·압구정·상암·대학로 등), 광화문 씨네큐브, 아트하우스모모, KT&G 상상마당 등에서 상영 중이다. 청소년 관람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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