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태 따위는 없다, 선 굵은 춤사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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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정희(左), 변인자(右)

전통춤 큰판이 열린다. 29일 서울 문화의 집 코우스에서다. 제목은 ‘한·일 판굿’. 제목만 봐선 일본의 전통 명인이 오지 않을까 오해하기 쉽다. 아니다. 한국의 뿌리를 놓지 않은 채 일본에서 왕성하게 활동중인 재일동포 명인이 함께하는 자리다. 지난해 처음 시작돼 풍물 한마당을 벌였다. 2회째인 올해는 도살풀이춤·소고춤·장고춤 등 상차림이 푸짐해졌다.

 ◆“교태부리지 마라”=국내파 중엔 도살풀이춤 명인 이정희(53)씨가 눈에 띤다. 도살풀이춤은 살풀이춤보다 두 배 정도 긴 수건을 쓴다. 경기도당굿에 나오는 6박의 도살풀이 장단에 맞춰 춘다. 빠른 듯 느려 공중에 붕 떠있는 느낌을 주곤 한다.

 이씨는 경남 밀양 출신이다. 1970년대 후반 서울로 올라와 스승과 숙식을 하며 기본을 다져왔다. 그 스승이 중요무형문화재 97호 살풀이춤 보유자인 김숙자(1991년 작고)씨였다. 김씨는 이매방과 함께 살풀이춤의 양대 산맥이다. “약간이라도 교태를 부리면 선생님은 회초리를 드셨어요. ‘네가 기생인 줄 아느냐. 예인답게 가슴을 울려야지’라고 하셨죠.”

 이씨의 춤은 담백하다. 어찌 보면 밋밋할지 모른다. 누구나 튀어야 사는 세상, 이씨의 자제하고 머금는 춤 솜씨는 그래서 세간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재야의 춤꾼으로만 잊혀질 듯 보였다. 그러다 2008년 제도권과 무림 고수를 망라한 ‘팔무전’에서 차분한 듯 폭풍 같은 디딤새를 보이며 중앙 무대를 뒤흔들었다. ‘이정희의 재발견’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태극기만 보였다”=재일동포 2세 변인자(60)씨의 이력은 독특하다. 열일곱 때 미스 재일동포로 뽑혀 한국에 왔다. 당시 선데이서울은 그와의 인터뷰를 실으며 “한국말을 잘하는 재일동포 소녀는 한국 고전무용에 심취돼 있다”라고 전했다.

 80년대엔 영화에도 두 번 출연했다. 재주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열살 때 시작한 한국 전통춤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남들은 왜 일본에 살면서 ‘일본춤’을 안 추냐고 물어요. 김치 먹고, 한국말 쓰고, 한국 학교 다녀서일까요. 어릴 때부터 태극기만 보였어요.”

 그는 70년대 중반 혼자 서울에 건너와 김백봉 선생으로부터 춤을 배웠다. 무용 유학이었던 셈이다. 현재는 도쿄 일대에서 한국 전통춤 전파에 앞장서고 있다. 이번 무대에선 신명 나는 장고춤을 춘다.

최민우 기자

▶한·일 판굿=29일 오후 5시 한국 문화의 집 코우스. 1만∼2만5000원. 02-3011-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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