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돈' 몰리자 '작품성' 실종

중앙일보

입력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것 아니냐. "

요즘 충무로 일각에서는 '한국영화 위기론'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한국영화계가 아직 안정권에 접어들지 못했는데도 흥청망청 거품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경계론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올들어 한국영화들이 하나같이 맥을 못추고 있기 때문이다. 1월이후 5월말까지 극장에 걸린 한국영화는 25편. 예년과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이 기간 중 한국영화를 보러 온 관객은 2백52만명(서울 기준)으로 20편을 개봉해 3백94만명을 모은 작년보다 1백40만명이나 적다. 총 관객은 9백6만명으로 지난해와 비슷하지만 한국영화가 차지하는 비율은 27.8%로 떨어졌다.

지난해 1년간 37%까지 점유율이 뛰어 사상 최대라며 축배를 들었으나 올해는 다시 예년 수준으로 돌아간 것이다. 〈반칙왕〉(82만명)〈거짓말〉(31만)〈박하사탕〉(31만) 정도가 선전했고, 10만을 넘겨 겨우 체면을 유지한 영화도〈동감〉(11만) 〈인터뷰〉(17만)〈아나키스트〉(21만) 등 세 편 뿐이다. 반면 1만명도 안 든 영화가 여섯 편이나 된다.

그렇다고 하반기의 전망이 밝은 것도 아니다. 한 제작자는 " 〈비천무〉나 〈단적비연수〉 같은 대작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기대를 걸 만한 작품이 별로 없다" 고 털어놨다.

한국영화의 갑작스러운 위축에 대해 메이저 제작자들의 태만 탓으로 돌리는 이들이 많다. 우노 필름은〈8월의 크리스마스〉〈처녀들의 저녁식사〉〈태양은 없다〉〈유령〉 등 괜찮은 작품을 내놓기로 정평있는 제작사다.

그러나 올들어 우노필름에서 나온 영화들은 줄줄이 참패했다. 〈행복한 장의사〉(7만5천) 〈플란더스의 개〉(4만3천)〈킬리만자로〉(7만6천)가 모두 쓴 맛을 봤다.

그렇다고 '돈은 못 벌었지만 작품은 괜찮았다' 는 평도 얻지 못했다. 영화계에서는 그 동안 영화를 꼼꼼하게 챙겨온 대표 차승재(39)씨가 제작 외의 일에 너무 매달린 탓으로 보고 있다.

올초에 창업투자사와 인터넷사등과 함께 투자조합을 결성했던 그는 '싸이더스' 라는 매니지먼트 사업으로까지 손을 뻗쳤다. 그러다 보니 제작하는 영화들에 소홀해진 것이다.

최근 한국 영화들은 대부분 장편을 처음 만드는 신인 감독 작품이다. 그럴 경우 안목과 경험있는 제작자가 콘트롤 해주지 않으면 작품이 옆길로 빠지기 싶다.

80년대말 이후 한국영화 시장이 살아난 데는 역량있는 제작자들의 '기획영화' 가 잇따라 성공한 것이 큰 힘이 됐다. 치밀한 마케팅 전략으로 관객의 기호에 부응하는 이른바 트렌디 영화 위주의 기획영화가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기획영화마저 실종되고 있는 것이다.

차 대표외에도 최근 외국투자사로부터 2백억원을 끌어들이는 등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시네마서비스의 강우석 감독이나 〈쉬리〉 로 한국영화의 지형을 바꿨다고 평가받는 강제규 감독의 행보에 대해서도 우려의 시선이 많다.

60억원의 벤처 자본을 끌어들인 강제규 감독은 최근 극장 사업으로까지 손을 뻗쳤다. 한 평론가는 "관객들은 강 감독의 영화에 열광하는 것이지 그의 사업에 기대를 거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아직은 자신의 역량을 영화 만드는데 쏟아주었으면 좋겠다" 고 밝혔다.

그는 "이번 칸영화제에 출품한 아시아 국가중 한국만 경쟁.비경쟁을 통해 한 부문도 수상을 못했다. 한국영화가 소재나 형식에서 진일보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수준에 대해 냉정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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