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의 진로] 5·끝. 경영자 감시장치 급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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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계획이 비현실적이었다. 당진제철소는 그동안 일곱차례나 사업계획을 변경했다. 냉연강판 수급 전망도 지나치게 낙관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은행 돈을 끌어썼다. 당진제철소 건설 당시 한보철강의 자본금은 8백억원이었지만 차입금은 무려 3조7천억원이었다. 아무도 정태수(鄭泰守)회장의 이런 무모함을 견제하지 않았다. 내부에 견제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이다. "

1997년 외환위기의 중요한 계기였던 한보그룹이 지난해 1월 자가진단해 국회에 제출한 부도원인에 대한 보고서다.

한보뿐 아니라 외환위기를 전후해 수많은 재벌이 쓰러지면서 재벌체제에 대한 본격적인 반성이 일기 시작했다.

경영능력이 없는 오너들이 독단적으로 경영해왔기 때문이라든가, 시대가 변했음에도 정경유착의 관행에 젖어 있거나 성장 지상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에 정부는 98년 1월 재벌개혁 5원칙, 지난해 8월에는 재벌개혁 '플러스 3원칙' 등을 내놓으면서 재벌 개혁을 독려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환영했다.

그러나 외환위기의 한 원인이 재벌의 과잉투자라면 이는 오너 체제냐, 전문경영인 체제냐의 문제와는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 최근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 황인학 박사는 "중요한 것은 투자자와 채권자 등이 경영자를 제대로 감시할 장치가 돼 있느냐는 점" 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역사적으로나 이론적으로도 입증된다.

일본의 경우 군국주의가 본격화된 30년대는 미쓰이.미쓰비시 등 이른바 옛 재벌보다 닛산과 일본질소 등 신흥재벌이 더 과감하게 투자했다. 재계에 명함을 내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덩치가 커야 했기 때문이었다.

정경유착도 마찬가지였다.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사이 일본을 떠들썩하게 한 이른바 제네콘(종합건설업체)스캔들과 같은 정계 로비는 오너 경영기업이건 전문경영인 기업이건 가리지 않고 행해졌다. 덩치를 키우기 위한 욕심은 오히려 전문경영인기업에서 더하다는 경제이론도 있다.

재벌문제의 핵심은 '내부에 견제시스템이 없었다' 는 한보의 자가진단 중 마지막 부분으로 요약된다.

黃박사는 "재벌 오너들이 무리하게 기업을 키우려 드는 것은 투자가 실패하면 자신의 소유지분만큼 책임지면 되지만, 이득이 생기면 거의 전부를 가질 수 있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책임은 유한(有限)이지만 과실은 무한(無限)으로 챙길 수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이는 전문경영인 체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전문경영인은 오히려 사임만 하면 된다. 투자에 성공해 덩치가 커지면 자신에게 돌아오는 금전적 보상과 명예 등 주어지는 것도 많다.

결국 남은 과제는 견제시스템을 어떻게 누가 만드느냐다. 오너 경영자 든 전문경영인이든 경영자를 감시할 수 있는 사람은 기관투자가를 비롯한 주주와 은행 등의 채권자를 우선 꼽을 수 있다.

주주는 아무래도 이익에 관심을 쏟고, 은행은 기업들이 빌린 돈을 효율적으로 투자해 제때 갚을 수 있는지에 신경쓰기 때문이다.

소비자와 경쟁기업들도 감시기능을 한다. 소비자들이 자기 제품을 사서 쓰지 않거나 경쟁기업이 오히려 더 좋고 값이 싼 물건을 만든다면 능력없는 오너나 전문경영인은 도태되고 비효율적인 기업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경영자를 견제할 수도 있다. 이사회가 대표적이다. 그동안 재벌체제에서는 오너가 구조조정본부의 도움을 받아 계열사 경영인들을 감시해왔다. 이 때문에 정부는 양쪽으로 제도를 개선해왔다.

김용구 미래경영개발연구원장은 "내부조직을 바꾸는 데 정부가 보다 더 관심을 쏟은 것은 그 대상이 분명한 데다 성과도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일 것" 이라고 분석했다.

金원장은 "재벌이 스스로 바뀌기를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기업 바깥에서 감시할 수 있는 기능이 보다 강화되지 않는다면 이사회가 바뀌는 것만으론 별 효과가 없다" 고 지적했다.

黃박사도 "정부는 외부 감시기능이 강화되도록 각종 제도를 바꾸는데 오히려 더 노력해야 한다" 고 말했다. 설사 바뀌지 않는 재벌이 있더라도 시장경쟁을 통해 도산하면, 바뀌지 말라고 해도 변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사실 어떤 기업형태가 우리 실정에 맞는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일본 기업이 잘 나갈 때는 일본식 경영과 지배구조를 본받자는 얘기가 있었다. 미국 기업이 잘나가는 지금은 미국식을 따르자는 논의가 활발하다.

이렇게 보면 어느 특정 기업형태를 정해놓고 따라가자는 게 아니라 정부는 경쟁의 제고라는 기업 경영환경의 대원칙이 지켜지도록 정비해놓고 나머지는 시장이 선택하도록 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생존하는 기업이 우리나라의 모범답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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