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신·현대사태에 정부 땜질식 처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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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신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현대사태의 여파까지 겹치면서 정부의 대응이 중심을 잃고 있다. 문제는 그대로 둔 채 은행 등 금융기관을 다그쳐 돈을 풀게하는 땜질식 처방이 되풀이되면서 해당 금융기관의 반발은 물론 정책의 신뢰성에도 손상을 입고 있는 것이다.

2일 이용근(李容根)금감위원장은 10개 시중.국책 은행장들을 급히 불러모았다. 李위원장은 "금융시장에 불안요소가 잠재해 있는데도 일부 은행 관계자들의 보신주의로 우량 중소.중견기업들까지 애로를 겪고 있다" 며 "우량 중견.중소기업의 신용대출이나 무보증 회사채 인수 등에 적극 나서달라" 고 주문했다.

금감위 관계자는 이와 관련, "올들어서만 45조원 가량이 2금융권에서 빠져나온 반면, 은행권에는 45조~46조원의 자금이 몰렸다" 면서 "금융시장에서 유일하게 돈줄을 쥐고 있는 은행이 나서주지 않으면 우량기업마저 흑자도산할 수 있다" 며 은행이 나서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 자금줄 왜, 얼마나 막혔나〓지난해 대우사태 후 투신권을 떠난 자금은 95조원 정도. 공사채형 수익증권의 이탈이 특히 많아 올들어서만 46조5천억원이 빠져나갔다.

하이일드.후순위채권(CBO)펀드 등에 몰린 16조원 가량의 자금이 그나마 투신위기를 막아준 셈이다.

채권의 최대 수요처인 투신권의 자금고갈로 중견기업의 회사채 신규발행은 사실상 중단됐다.

이에 따라 올 회사채발행은 지난달 말 현재 5조5천억원으로 지난해(17조3천6백억원)의 3분의 1로 줄었다.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지난해 대우사태로 한국.대한.현대투신 등 주요 투신사들이 골병이 들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공적자금 투입 등 근본대책을 미룬 정부의 책임이 크다.

이와 관련,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호에서 "(현대투신 등)투신문제가 여전히 한국금융시장 불안의 근원이 되고 있다" 며 "한국정부가 국회동의를 통한 추가 공적자금 조성을 기피하는 등(소극적으로 대처할 경우) 투신 문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 이라고 지적했다.

◇ 금융권 반발〓정부의 중견기업 지원요청은 수익성과 위험관리라는 선진금융모델과 배치될 뿐 아니라 국제결제은행(BIS)자기자본비율 하락 등이 우려돼 어렵다는 게 은행권의 반응이다.

H은행장은 "정부 취지에는 공감하나 기업 지원은 각 은행이 독자적으로 판단할 일" 이라며 "대출을 무작정 늘리면 위험자산이 늘어나 BIS비율관리에 어려움이 생긴다" 고 말했다.

한 종금사 임원은 "투신이 먼저 회사채나 기업어음(CP)의 만기를 연장해주지 않는데 은행이나 종금사가 이를 메우라는 것은 어불성설" 이라며 "정부가 공적자금을 추가 조성해서라도 투신 부실문제를 일찍 해결했으면 지금 금융기관들을 모아놓고 얘기 안해도 서로 앞다퉈 기업들에 대출해주려고 경쟁했을 것" 이라고 말했다.

증시 일각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정부가 위기설이 나도는 H.S그룹 등 중견기업의 부도를 막기 위해 나섰다" 는 소문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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