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제는 더 보고 싶게 만드는 미혹의 온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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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르본느 대학 근처에 '아카톤'이란 극장이 있습니다. 주로 욕망과 권력을 주제로 한 비제도권 영화를 트는 곳입니다. 저는 유학생활을 하는 중에 심신이 지치면 이따금 그 영화관에 갔습니다. 대개는 친구들과 함께. 동행을 택한 것은 그 영화관 바로 옆에 파리에서 오리와 새우 요리를 가장 싸고 맛있게 하는 중국 레스토랑 '진업루'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로 성(性)이라는 본능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영화를 보고 나와서, 그것만큼 질긴 다른 본능인 식욕을 위해 함께 신나게 저녁을 먹는 것. 이국에서의 고달픈 일상에 드물게 떠 있는 휴식의 섬이었죠.

그런데 94년 봄의 어느 날 저는 혼자서 그곳에 갔습니다. 일본영화 〈감각의 제국〉을 보기 위해서였죠. 왠지 그것만큼은 혼자 보고 싶었습니다. 이탈리아 시인이자 감독인 파졸리니의 〈소돔의 120일〉을 혼자 보고 싶었듯이.

관객은 많지 않았고, 더러는 중간에 아름답지만 무서운 화면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나가기도 했습니다. 하드코어 포르노로 분류될 그 영화는 서양인에게도 고역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호기심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끝까지 그 영화를 보고 나왔습니다.

아무런 가감이 없는, 냉혹할 정도로 사실적인 나체의 육신들. 상식과 관습에서 일탈한 도착적 성행위. 그리고는 욕망의 극한인 죽음으로 치달으며 남자의 성기까지 자르고는 미쳐버린 나이 어린 게이샤의 엽기적 행각. 그 영화가 파리에서도 한 사건이었던 것을 그때서야 이해했습니다.

물론 그 깨달음은 상당한 충격이었던 것 같아요. 그 맛있는 중국 음식도 잊고, 누구인가가 간절히 필요해서 기숙사로 달려간 것을 보면. 그날 누가 제 앞에 앉게 되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떤 여자였을까?

어쨌거나 지금은 기숙사 앞의 카페에서 늦은 밤까지 맥주를 마시며 취한 기억만이 남아 있습니다. 물론 그 영화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냥 막연히 생이 두려웠으니까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리들 존재와 삶의 무서운 심연이. 언뜻 드러난 진실의 얼굴이.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생각한 그 심연을 그러나 저는 그 뒤로 두 번이나 더 보았습니다. 한 번은 '아카톤'과 비슷한 다른 소형 영화관에서, 그리고 한 번은 TV에서. 두 번째로 보았을 때, 〈감각의 제국〉에 대해 분석과 해석의 형식으로 무슨 말인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보았을 때는, 이제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연의 바닥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그 영화의 끝장을 본 것이죠.

프랑스는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영화에 관한 한 절대 '가위질'이 없는 나라입니다. 영화 종주국으로서의 자존심의 표출이기도 하겠죠. 어쨌거나 그 영화는 '16세 이상'이기만 하다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16세는 사회적으로 성(性)을 용인하는 나이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몇 살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없거나, 있다면 제각각이겠죠. 그래서 그렇게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이 영화는 온통 가위질을 당한 채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우선 그 악역의 주인공이겠지만, 사실은 스캔들을 불러일으켜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싶었던 수입업자가 더 주범이겠죠. 10분 가량을 덜어낸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갖든 말든 돈벌이만 된다면 괜찮다는 그 상업적 사고 말입니다.

프랑스에서는 '16세 미만 시청 불가' 표지를 화면 구석에 조그맣게 달고 공중파 방송을 통해 삭제 없이 모든 화면이 나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화관에서조차 잘려나가 불구가 된 작품을 보아야만 합니다. 유호 프로덕션 류(類)의 되지도 않은 영화들, 알아서 긴 삼류 에로영화들은 버젓이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데 말이죠.

인간은 물론 불완전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행하는 검열의 근거가 바로 거기에 있겠죠. 그렇지만 그 불완전함은 바로 우리들의 진실을 이루는 가장 핵심적인 본질입니다. 불완전하기에 사랑이 필요합니다. 에로스는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죠. 불완전하기에 죽습니다. 그리고 그만큼의 빈 공간을 후세에 남깁니다.

죽지 않는다면, 그 다음을 이어갈 타인들의 - 자식까지 포함해서 - 다른 생도 존재할 수 없을 테니까요. 인간의 성(性)은 그래서 사랑의 에로스와 죽음 욕망인 타나토스가 다 들어 있는 가장 원초적인 본능입니다. 성이란 사랑하고, 스스로 죽으며, 다른 삶을 생기게 하는 것이니까요.

죽음이 때로 가장 격렬한 생기(生氣)의 표현으로서, 생기(生起)와 동의어가 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불완전함에서 기인한 본능이 없다면, 식욕과 성욕이 없다면 무언가 새로이 생겨나는 일도 없겠죠?

〈감각의 제국〉에서 성은 일본 군국주의로 상징되는, 원초적 본능의 극단적 대립물들, 인식의 장애물들을 해체하고 전복시킵니다. 원본의 마지막 부분이 단순히 엽기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러한 지향점을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몇몇 장면을 문제 삼으며 '바닥'을 지워버린 행위는, '끝장'을 볼 수 없게 만든 것은,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무섭더라도 진실과 마주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얼굴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 속 깊은 바닥까지 가 본 자만이 수심(水深)을 압니다. 끝장을 보지 못하면 바닥의 진실된 얼굴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101분의 원본이 아니라, 삭제된 91분 짜리 한국판은 역설적인 범죄입니다. 계속해서 헤매고 방황하게 만드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성의 노예로 만드는 왜곡된 결과를 낳습니다. 보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계속해서 보고 싶게 만드는 삼류 에로영화처럼 말입니다.

삭제는 바로 그런 미혹의 온상입니다. 그래서 권력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끝장을 보지 못한, 삭제되고 남은, 죽은 이미지들만을 요구합니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죠. 대중들이 바닥을 차고 오르지 못할 테니까요. 끝장을 내지 못하는 것이죠. 영상물등급위원회라는 행정기관이 되었든, 상업주의에 눈이 먼 수입업자가 되었든, 〈감각의 제국〉의 삭제 행위는 바로 우리 문화의 그런 불구상태를 보여줍니다.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식할 수 없도록 만듦으로써 더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적어도 이 영화에 있어서 만큼은, 아니 언제나 삭제를 반대합니다. 끝장을 보고 싶으니까요. 그것이 바로 성숙으로의 첫출발일 테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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