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나지 않은 세상의 알맹이를 찾아야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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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의 그리 밝지 않은 조명 아래에서도 선글래스를 벗지 않고 핸드폰을 거는 남자:"선글라스는 제게 알지 못할 자유를 줘요.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익명성으로의 침잠'같은 자유."

교보문고의 널찍한 자동문을 한사코 거부하고,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에는 버거운 비상구를 통해 지상으로 올라오는 남자:"개구녕을 좋아해요. 뭐 그냥 좋잖아요."

프랑스에서 6년 동안 불문학 공부를 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심각한 적응 장애를 겪었던 남자:"지금은 겨우 안정을 찾고 있어요. 97년 귀국한 당시부터 한국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어요. 그 변화에 적응한다는 게 제게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봉건 문화에서부터 포스트모던한 문화까지 혼재한 사회의 양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겁니다. 프랑스의 경우 겨의 30년에 걸쳐 지나온 변화의 과정을 우리는 불과 2,3년 안에 겪은 겁니다."

그 급격한 변화의 하나인 인터넷을 절실한 필요에 의해 누구보다 먼저 사용했던 남자:"파리에 처음 갔을 때, 한국의 소식이 궁금했어요. 그러나 한국 신문을 받아보는 일은 쉽지 않았지요. 그때 마침 인터넷을 이용하면, 한국의 신문을 리얼타임으로 볼 수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한국의 신문 사이트에 접속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인터넷에서 제가 필요로 하는 일만 했기 때문에 지금도 신문과 도서 검색 외의 기능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습니다."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재즈 음악을 시끄럽게 틀어놓고 빨간 승용차가 위반 속도에 오를 때까지 엑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떼지 않는 남자:"제가 25년 동안 자라온 춘천이라는 고장은 그다지 큰 변화가 없는 조용한 도시입니다. 그곳에서 또 저는 이른바 '범생'으로 자랐습니다. 모범생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범생의 시각으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다소 위악적이 되고 싶을 때가 있는 거지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도 팔찌와 목걸이, 그리고 귀걸이를 걸어 보고 싶어하는 남자:"진한 향수를 듬뿍 제 온몸에 뿌려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지요. 프랑스에 있을 때에 향수는 원 없이 뿌려봤습니다. 그리고 귀국해서 팔찌와 목걸이, 귀걸이를 해 보고 싶었지요. 제 나름대로는 팔찌와 목걸이, 귀걸이 등의 장식을 '범생에서의 일탈 행위'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나 이미 팔찌와 목걸이는 일반화 됐더군요."

미처 드러나지 않은 현상을 들여다 봄으로써 드러난 사실 뒤에 감춰진 진실을 찾아보고 싶다는 남자:"드러난 것만을 보는 것은 평범한 방식이잖아요. 이제 우리는 드러난 것을 한번 쯤 뒤집어 보고, 또 드러나지 않은 것을 찾아서 드러난 것 위에 덮어 씌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을 조금 삐딱하게 보면 알 수 없었던 진실을 찾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르지요."

조인스닷컴의 Books에서 〈박철화의 세상 읽기〉를 집필하게 될 소설가이며 문학평론가인 박철화:"표리가 부동한 위선적인 성격을 갖는 우리 사회를 비틀어보기 방식을 통해서 감추어졌거나 감추고 싶어했던 것들을 찾아내는 일이 세상을 보다 정확하게 보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미처 드러난 것에 담기지 않은 세상의 알맹이를 찾기 위해 삐딱하게 보겠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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