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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우롱하는 ‘머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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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모세종
인하대 교수·동양어문학부

이익집단의 저항에 일침을 놓아 겨우 국민이 바라는 바가 하나 이루어지나 했더니 난데없이 국회의원들이 수퍼 약 판매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나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다. 약국 이외의 곳에서 약을 판매하면 국민들이 아무렇게나 약을 사먹는다는 말인지, 국민들을 판단력도 없는 무지한 사람들로 무시하고 있다.

 약국들 중에는 감기약이 종류별로 진열돼 있어 국민들이 자유롭게 선택해 살 수 있는 곳이 많다. 그런 약을 팔면서 약의 부작용이나 오·남용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약국은 본 적이 없다. “머리 아프니 두통약 하나 주세요” 하면 그냥 돈 받고 약 주는 곳이 약국이지 약사의 지도를 받고 산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언론에 광고되는 약이나 박카스 하나 사먹는 데 약사의 도움은 필요치 않을 것 같다. 간단한 약은 사먹으라고 모든 매체가 광고하고 있는데, 그럼 이런 것들이야말로 사라져야 하지 않는가.

 약의 오·남용이 위험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의사 처방 없이 약국에 있는 감기약 골라 사먹어 크게 문제된 사람을 주변에서 보지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의사의 처방으로 약을 사야 하니 약사와 상의해 약을 결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약국에서는 의사가 처방하는 약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팔아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맞다. 의사의 판단에 따라 처방된 약만을 판매하는 것이 오·남용을 막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건강을 걱정한다고 하나 이는 그럴듯한 포장이다. 건강에 해로운 것들은 비단 약뿐만이 아니다. 패스트푸드, 탄산음료, 소금, 설탕, 기름진 고기, 탄수화물이 많은 쌀 등 다량섭취하면 안 되는 수많은 먹을거리가 있지만 이들을 자격이 있는 자들이 지정된 장소에서 설명을 해 가며 팔고 있지는 않다. 흡연이 몸에 해롭지만 공기업에서 담배 만들어 팔아도 국회의원들이 이를 법으로 규제하려 하지 않는다. 과음이 안 좋지만 술집에서 술 파는 양을 제한하지도 않는다. 국민의 건강을 해칠 수 있는 것은 약의 오·남용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약국에 가 약이 판매되는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약국에서 약을 사먹어야 오·남용을 막는다는 터무니없는 주장보다 오히려 선진국들의 모습으로 우리의 약국들을 개선할 안을 내놓아야 한다. 약사와 약국이 좀 더 경쟁력을 갖추도록 도와주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 될 것이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의 교육국가다. 문제가 없는 일반 약 하나 사는 것은 그냥 국민 개개인의 판단에 맡겨도 충분하다.

 정치가들은 제도의 새로운 변화를 주장할 때면 선진국에서 시행하고 있으니 검증된 것처럼 이야기하며 필요할 때는 잘도 갖다 붙인다. 많은 선진국에서 약국이 아닌 수퍼와 같은 가게에서 파는 약을 한국에서는 안 된다니, 이 제도는 한국이 선진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이야기인지 묻고 싶다. 그렇다면 미국·일본·유럽 선진국들에 대해 큰소리로 그 잘못을 지적해 보기 바란다.

 정치가로서 표를 의식한 것이라면 유권자의 몇%가 이익집단이고 몇%가 변화를 찬성하는 국민인지 그런 계산쯤은 했을 터다. 그런데도 국민들에 반하는 주장을 하는 데에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으로 비친다. 국민들은 정치가 아니라 정치가의 행태를 싫어하고 있다. 서울 시장 선거를 앞두고 국민들은 정치가의 선택에 대해 변화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국민의 대표라 하면서 국민의 의견을 무시하고 이익집단만을 위한 행동을 계속한다면 이제는 여야를 막론하고 국민들은 새로운 일꾼으로 정치가를 일신하려 할 것이다. 국민을 대표한다는 것은 국민 대다수의 건전한 의견을 정책에 반영하는 것이 시작이다.

모세종 인하대 교수·동양어문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