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멘스, 프랑스 은행서 돈 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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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독일 지멘스의 최고경영자 페터 뢰셔(57·사진)가 최근 결단했다. 프랑스 은행과 금융 거래를 중단했다. 그는 예금을 전액 찾았다. 한두 푼이 아니다. 파이낸셜 타임스(FT)에 따르면 40억~60억 유로(약 6조2000억~9조3000억원)다. FT는 “프랑스 은행들이 금융위기에 빠질 수 있어 지멘스 경영자가 예금을 인출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프랑스 은행이 의심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거래 상대방 의심하기(카운터파티 리스크)’다. 2008년 9월 15일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한 직접적인 이유였다. 당시 금융회사들과 펀드들은 리먼이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의심했다. 그들은 리먼과 자금거래를 최대한 억제했다. 결국 리먼은 단기 자금을 조달할 수 없어 백기를 들어야 했다.

 지멘스는 프랑스의 그 은행이 어느 곳인지 밝히지 않았다. FT는 “금융시장엔 프랑스 최대 시중은행인 BNP파리바라는 설이 나돌고 있다”며 “하지만 BNP파리바라는 설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로이터 통신은 “지멘스가 예금을 인출한 곳은 프랑스 2위 은행인 소시에테제네랄”이라고 20일(한국시간) 보도했다.

 그렇다면 뢰셔는 그 많은 돈을 어디에 뒀을까. 그는 다른 나라의 은행도 미덥지 않았는지 유럽중앙은행(ECB)을 선택했다. 그렇다고 ECB가 은행이 아닌 일반 기업과 자금 거래를 시작한 건 아니다.

지멘스는 은행 면허를 보유한 몇 안 되는 유로존 거대 기업이다. 1년 전쯤 뢰셔의 전략적 결단 덕분이다. 당시 그는 “우리가 은행 면허를 보유하고 있으면 또 다른 금융위기 와중에 큰 유연성을 발휘해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뢰셔의 이번 결단은 꿩 먹고 알 먹기다. ECB 금리가 높기 때문이다. ECB는 최근 일주일짜리 예금 계정을 시중은행에 제공하기로 했다. 연 1.01% 금리를 적용하는 조건이다. 덕분에 뢰셔는 가장 많이 받으면 연간 6060만 유로(약 940억원)의 이자를 챙길 수 있다. 앞서 지멘스는 유럽 시중은행에 짧은 기간 자금을 맡긴 대가로 연 0.95% 정도의 이자를 받았다.

 지멘스만이 프랑스 은행과 거래를 중단한 건 아니다. 미국 금융전문 채널인 마켓워치에 따르면 중국은행(BOC)도 통화스와프 계약을 그만뒀다. “확인되진 않았지만 이번에도 프랑스 BNP파리바라는 설이 금융시장에 나돌고 있다”고 마켓워치는 보도했다.

 중앙은행이나 시중은행은 단기 자금을 마련할 때 통화스와프를 즐겨 사용한다. 양쪽이 서로 필요한 통화의 자금을 얻는 대신 덜 필요한 통화의 자금을 건네는 방식이다. 프랑스 은행들은 요즘 이 거래를 통해 달러 자금을 마련했다. 중국 은행들이 그 거래를 중단한다는 말은 곧 단기 자금 조달 창구의 하나가 닫힌 셈이다. 이 모든 것은 프랑스 은행들의 카운터파티 리스크가 커지고 있는 방증이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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