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향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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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조선은 의과(醫科)를 잡과(雜科)로 취급해 천시했다. 의학은 중인들의 학문이었지만 가끔 의학에 밝은 선비 의사, 즉 유의(儒醫)가 있었다. 사대부들이 의학을 공부한 이유는 효자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남송(南宋)의 주희(朱熹·주자)가 편찬한 『소학(小學)』은 “어버이가 누워계실 때 용렬한 의사에게 맡기는 것은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고 효도하지 않는 것과 같다”면서 “어버이를 섬기는 자는 의학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정이천(程伊川·정자)의 말을 싣고 있다. 당(唐)나라의 왕발(王勃)은 “사람의 자식은 의학을 알지 않을 수 없다(人子不可不知醫)”면서 장안(長安·서안)에서 비방(秘方)에 능했던 조원(曹元)을 쫓아다니며 의학을 배웠다.

 그러나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사람의 자식 된 자가 마땅히 의학을 알아야 하는 변증설(爲人子當學醫辨證說)’에서 “지금 사대부로서 혹 의학서를 읽으면 인심이 업신여기고 비웃으며, 병의 증상에 약을 조제해 투약하면 사류(士類)들이 모두 천하게 여긴다”고 전하고 있다. 이규경은 “나라의 습속이 의학에 종사하는 자들의 문벌이 낮고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숭품(崇品·종1품)에 오른 태의관(太醫官·어의 수장)도 대간(臺諫)의 하인들이 낮춰본다”고도 말했다.

 사대부들이 의학을 천시하면서 그 자리를 메운 것이 향의(鄕醫), 즉 시골 의사들이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현종 13년(1672) 9월조에 따르면 향의 방태중(方泰重)이 어의가 돼 현종을 치료했고, 같은 책 숙종 29년(1703) 1월조에도 향의 금자극(金自克)이 정원 외 어의로 임명된 기사가 있다. 향의로서 어의까지 된 것은 대단한 치료 실적을 보였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향의에 대해 조선 후기 사대부들은 “향의가 잘못 치료했다(鄕醫誤治)”거나 “향의는 약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鄕醫不知藥)”는 식으로 대부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유배지에서 『촌병혹치(村病或治)』를 썼으며, 그전에는 아들을 마진(痲疹·홍역)으로 잃고 나서 치료법을 연구한 『마과회통(麻科會通)』도 지었다. 『마과회통』은 종두법(種痘法)까지 소개하고 있으나 의약을 천시하던 나라에서 두루 활용될 리 만무했다. 장효조와 최동원이라는 불세출의 스타가 잇따라 타계했다는 소식에 어의나 향의들의 비방이라도 전수되었다면 달라졌을까.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