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공회전을 하자

중앙일보

입력

100m 달리기를 하다보면 숨이 차서 헉헉거리면서도 문득 내가 왜 이렇게 달리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1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결승점을 코앞에 두고도 잠시 목표를 잃고 그렇게 헤매일 때가 있는데 하물며 긴 인생에서는 오죽할까?

특히 이런 생각들은 일주일에서 6일 동안 막 정신없이 살아가다가 잠시 쉬게 되는 일요일에는 더더욱 집요하게 꼬리에 꼬리를 문다. 종일 자고 일어났다든가, 쉬는 일요일에 뭔가 뜻깊은 걸 해보리라 맘먹었다가 잘되지 않을 때면 그날 밤엔 영락없이 아 사는 게 뭐 이런가 싶어지니 말이다. 물론 늘 그렇게 심각하게 사는 건 아니지만.

내가 즐겨보는 <카이스트>에도 이번에는 지독한 슬럼프에 빠진 여성연구생 남희가 등장했다.

<카이스트>는 사랑에 울고 웃는 뭇 드라마들과는 달리 인간을 위한 과학적인 삶을 연구하고 고민하는 카이스트생들의 생기있고 괴짜 같은 생활들이 녹아 있는 독특한 매력을 풍기는 드라마다. 그래서 일요일 늦은 시간이면 어김없이 챙겨보곤 하는데 이번에는 한 과학도의 고민을 담아내고 있었다.

주인공 남희는 랩에서 항상 후배들을 보듬어주고, 자기 생활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교수의 일정까지 관리해주면서 그 와중에 연구까지 한다. 그러나 여성 공학도로서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나 많은 연구생활에 서서히 지쳐간다.

자신은 연구보다 어지러운 랩실을 치우거나 담당교수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잡무만 잘하는 것 같은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논문 심사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며 세미나에서는 발표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그만 버벅거린다. 그러는 사이에 선보기로 했던 남자는 학교까지 남희를 찾아와 남희는 카이스트에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고 충고한다.

특히 남희는 카이스트의 다른 여성 공학도들처럼, 가령 예를 들면 추자현처럼 왈가닥도 아니고 해성이처럼 엉뚱하고 천재적이지도 않다. 게다가 과학도들에게도 성차별은 만만치 않다. 한 프로젝트를 연구해 세미나에서 발표를 해도 여자가 하면 연구 사실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고 교수 임용에서도 아주 뛰어나지 않으면 여자보다는 남자가 교수되는 게 더 쉬운 것이다. 그래서 연구를 하다 포기하고 결혼해버리는 여성 연구생들이 많지만 남자 연구생들은 오히려 그런 여성 연구생들을 비난만 한다.

상황이 이쯤되면 누구든지 자신의 생활을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나 내가 너무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니었나 싶어서 자신에게 맞는 또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은 우물 밖을 넘겨다보며 이리저리 방황하게 되기 마련이다.

남희는 심지어 자신이 공회전하고 있는 자동차 같다고 생각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공회전해 환경공해만 일으키는 자동차처럼 자신도 무의미하게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불안해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고민 끝에 남희는 열심히 자동차를 만들고 대회에 출전하는 또다른 여성 공학도 추자현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힘을 얻는다. 후배 여학도 추자현이 그녀에게는 어떤 충고의 말보다도 힘이자 자극제가 되었던 것이다.

살아가다보면 이렇게 남희처럼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가 하며 주춤거리거나 지금 나아가는 방향이 제대로 된 것인지 불안할 때가 종종 있다.

그렇지만 우물 안 개구리같은 생활에서 오는 공허감으로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으려면 잠깐 자신의 삶을 점검하는 공회전도 필요하지 않을까?

가끔 남희처럼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어 보고 나도 혹시 지금, 계속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공회전만 하는 자동차처럼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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