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언니랑 역할 바꿔 얘기하니, 몰랐던 서로를 알게 됐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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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 있습니다. 상대편과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보라는 의미죠. 그가 처한 상황과 입장이 돼보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없고 긍정적인 결론에도 쉽게 도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역지사지하기 가장 힘든 상대가 누구일까요. 의외로 가족을 꼽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과서에는 추석을 앞두고 가족끼리 역할을 바꿔보며 이해의 폭을 넓히는 내용의 만화가 실려 있습니다. 이번 명절 연휴 때는 가족끼리 역지사지하며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간단한 역할극을 해보면 어떨까요.

한 가족이 있다. 아빠·엄마와 두 딸 박지연(29)씨와 지현(15·경기도 야탑중 3)양. 화목한 가정이지만 가끔 서로에게 답답한 벽을 느낀다. 지연씨는 지난 5년 동안 미국의 한 대학에서 한국어 교육 강사로 일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어리기만 하던 동생이 훌쩍 커 있어 적응이 안 된다. 지현이는 평범한 자신에 비해 똑똑하고 밝은 언니 옆에 서면 자꾸 주눅이 든다. 이 가족이 무대에 섰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지현이가 주인공이 됐다. 아버지는 직장에 근무하느라 함께 자리하지 못했다. 엄마와 두 딸이 서로 입장을 바꿔 가며 갈등을 치유하는 역할극을 펼쳐 봤다.

글=박형수 기자
사진=황정옥 기자

등장인물: 주인공 박지현, 엄마 정순호(56·약사), 언니 박지연(한국어 교육 강사)

진행: 박우진(참만남사회심리극연구소 소장)

무대 설정: 무대에는 의자 3개가 놓여 있다. 지현이와 엄마·언니의 자리를 상징한다. 자리를 바꾸면 역할도 바뀐다.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수시로 역할이 바뀐다.[ ]안은 맡은 역할.

박지현양이 엄마·언니와 입장을 바꿔보는 역할극을 했다. 박양은 엄마를 떠올리면 “‘일찍 일어나라’고 혼내는 모습이 가장 먼저 연상된다”고 말했다. [황정옥 기자]

1장. 서막(가족 안에 숨은 문제 찾아내기)

막이 오르고 지현이와 엄마·언니가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있다.

-진행자: 지현이가 가족에게 가장 섭섭한 순간은 언제죠?

-지현: 언니와 나를 차별할 때요.

-엄마: 엄마가 언제 차별을 하는데?

-지현: 언니는 놀러 간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가라’고 하잖아. 나는 다그치고 혼만 내고.

-언니: 그건 네가 어려서 걱정되기 때문이잖아.

-지현: 어리면 뭐. 맨날 놀러 가는 것도 아닌데.

 
2장. 지현과 엄마, 서로를 이해하기

언니 퇴장하고 무대에는 엄마와 지현만 있다.

-지현: 엄마, 친구들이랑 놀이공원 가면 안 돼?

-엄마: 넌 왜 맨날 놀이공원 타령이냐?

-지현: 내가 언제 그랬는데?

-엄마: 놀러 가도 돈만 쓰는 놀이공원 말고 좀 다른 데 없니.

-지현: 그러면 옷 사 달라 그럴까? 사 주지도 않잖아.

-엄마: 엄만 옷은 충분히 사 줬다고 생각해.

-지현: 나한테는 아니잖아. 언니 열 벌 살 때 나는 한 벌 살까 말까 잖아.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엄마가 뒤돌아 앉는다. 엄마의 등에 대고 지현이가 평소 하고 싶었던 말을 털어놓는다.)

-지현: 속상하고 짜증나. 맨날 나만 다그치고. (울기 시작하며) 나는 나한테도 관심 좀 가져 달라고 이야기하는 건데, 엄마는 말도 제대로 안 들어 주고 나한테 짜증 부리고. 그럼 내 기분이 좋을 것 같냐고.

(진행자, 이번엔 지현이를 뒤돌아 앉게 하고 엄마의 마음을 들어본다.)

-엄마: 너는 못 느끼겠지만 엄마랑 아빠는 늘 네 생각밖에 안 하는 것 같아. 언니가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엄마 고민이 더 늘었어. 그동안 너에게 쏟던 관심이 언니한테도 나눠지니까 네가 느닷없이 찬밥이 된 것 같은 생각이라도 하는 건 아닌지 싶어서. 나름대로 신경 쓴다고 쓰는데….

(엄마와 지현, 역할을 바꿔 본다.)

-지현[엄마역]: 너 지금 어디야?

-엄마[지현역]: 그냥 친구랑 있는데.

-지현[엄마역]: 친구 누구?

-엄마[지현역]: 누구라고 하면 다 알아?

-지현[엄마역]: 뭐하고 놀고 있어?

-엄마[지현역]: 내가 왜 다 말해야 하는데?

-지현[엄마역]: 엄마가 일하느라 바쁘고, 네 걱정은 되고. 그러니까 자꾸 물어보는 거잖아.

-엄마[지현역]: 나 좀 믿어줘.

3장. 지현과 언니, 화해하기

언니가 무대에 오른다.

-언니: 지현이가 태어나기 전에 나는 꿈에서 너를 봤어. 정말 만나보고 싶었어. 언니는 너랑 더 재밌게 지냈으면 좋겠어. 너 혼자 그렇게 삭이고 살면 답답하지 않아?

-지현: ….

(지현과 언니, 역할을 바꾼다)

-지현[언니역]: 답답하지 않아?

-언니[지현역]: 답답하지, 어쩌겠어.

-지현[언니역]: 어떤 게 제일 힘들어?

-언니[지현역]: 언니는 저번에 술 마시고 1시에 들어왔잖아. 나는 나가기만 하면 전화하고. 친구들도 ‘너네 엄마 왜 그러시냐’고 놀려.

-지현[언니역]: 너는 청소년이잖아.

-언니[지현역]: 청소년이면 뭐 달라? 놀고 싶은 건 똑같지.

-지현: (진행자에게) 언니는요, 말을 잘하거든요. 같이 이야기하면 나만 자꾸 몰리는 기분이에요.

-진행자: 언니에게 한번 요구해 보세요.

-지현: 언니가 말 잘하는 걸 이용해 나를 난처하게 만드는 거 줄였으면 좋겠어.

4장. 속마음 털어놓기

가족이 동그랗게 마주 보고 앉았다.

-지현: 나한테 표현을 안 한다고 하는데, 내가 말을 하려고 하면 듣지를 않잖아. 엄마, 아빠도 그렇고 언니도 다른 이야기로 돌려 버리고.

-엄마: 그건 우리가 너보다 인생 선배라 그래. 한마디만 들으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거든. 이제부터는 엄마가 너한테 보조를 맞춰 줄게.

-언니: 언니가 곧 미국으로 다시 가야 하니까, 짧은 시간 동안 너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나봐. 이제부터는 언니가 지현이 말을 많이 들어줄게.

-지현: (진행자에게) 마음이 후련하고 재미있어요. 그동안 언니랑 엄마가 다그친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제가 받고 싶던 관심이었던 것 같아요.

역할극을 할 때 유의점   ※도움말: 박우진 참만남사회심리극연구소 소장

1. 주인공을 정한다:역할극이건 심리극이건 반드시 주인공이 있어야 한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의 역할을 결정한다.

2. 주변 인물은 실제와 다른 역할을 맡을 수 있다:엄마가 아빠 대역을 해보거나, 형제·자매가 부모 역할을 할 수 있다. 주인공과 갈등이 깊은 관계라면 실제 인물보다 대역을 쓰는 편이 효과적일 수 있다.

3. 소품을 적극 활용하라:주인공의 스트레스같이 억압된 감정을 상징하는 소품을 활용한다. 감정이 해소됐을 때 소품을 던지거나 찢는 행위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예> 여러 가지 색깔의 천: 빨간색은 차별로 인한 스트레스, 노란색은 성적 때문에 받은 상처로 규정한 뒤 역할극이 끝나고 힘껏 던져버린다.

4. 역할극 중 나온 이야기로 새로운 갈등 일으키지 말아야:주인공이 마음속에 숨겨둔 이야기를 꺼내다 보면 주변 인물들의 마음이 상하는 경우도 있다. 역할극 중 나온 이야기를 빌미삼아 새로운 갈등을 일으키면 주인공은 더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역할극이 끝나면 주인공과 주변 인물이 화해하는 선에서 갈등을 마무리해야 한다.

중앙일보 기사로 더 생각해 보세요

상대편 시각에서 상황 보면 이해 폭 넓어져

2003년 11월 14일자 W3면 체험! 역지사지

‘라쇼몽’은 숲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두고 산적과 사무라이·여자·나무꾼이 서로 다른 진실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같은 상황도 각자의 처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는 의미다. 일상생활도 마찬가지다. 내 입장에서는 “네가 내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분노하지만 상대편 생각에는 그게 배려일 수 있다. 역지사지가 필요한 이유다. 상대방의 입장이 돼 보는 ‘역할극’이 교육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역할극은 쓰임도 다양하다. 직장에서는 동료 간 친화력을 높이거나 고객 서비스를 높이는 방법으로 활용된다. 대학생들에게는 진로에 대한 구체적 다짐을 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청소년들은 역할극을 통해 또래나 부모님과의 갈등을 해결하는 경우도 많다. 왕따같은 여러 교육 문제가 벌어지는 학교 현장에 역할극을 도입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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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23일자 W8면 울산광역시시설관리공단, 역지사지 역할극으로 서비스 정신 키워

2010년 3월 12일자 23면 의술보다 환자 마음 치료 먼저 배우는 의대 새내기

2009년 1월 28일자 C2면 “나는 공주 너는 왕자” 역할극 하니 책 내용이 쏙쏙

2005년 11월 2일자 C1면 ‘칭찬 말 나누기’ … 인성까지 키운다

2004년 10월 22일자 W12면 내가 집에서 노는 줄 알아?

2003년 11월 14일자 W1면 역지사지 입장 바꿔 생각해보니!

마음 표현이 심리 치료의 첫걸음

역할극은 정해진 대본 없이 자신이 맡은 역할에 몰입해 각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쏟아놓는 것이다. 평소 부모나 교사 같은 성인에게 억눌렸던 청소년들에게 감정 발산의 기회를 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해준다. 역할극을 경험한 학생 중 대다수가 “후련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가정이나 학교처럼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것과 같은 정신적·물리적 폭력에 시달린 학생들에게는 후련함을 넘어 심리치료의 효과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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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3일자 16면 말하면서 억눌린 감정 분출, 카타르시스 효과 느껴

2011년 3월 14일자 S6면 밥이 싫다는 아이, 말 못 할 고민 있을지도 몰라요

2002년 2월 14일자 23면 알코올 중독자 자녀 마음 고통 “사이코 드라마로 풀어요”

이번 주 주제와 관련된 NIE 활동 이렇게

1. 최근 ‘가족 코드’의 오락 프로그램이 많다. 가상 신혼체험을 내세운 MBC의 ‘우리 결혼했어요’가 대표적이다. KBS ‘1박2일’은 맏형 강호동에서 막내 이승기까지 6형제의 ‘유사 가족’으로 볼 수 있다. 아래 기사를 읽고 신문에서 가족으로 삼고 싶은 이미지를 찾아 붙이고 왜 이런 가족을 구성했는지 적어본다.

전혀 남남인 이들이 가족처럼 보이는 이유는 한 공간에서 먹고 자는 일상사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의 주 내용도 식사 준비, 집안일 나눠 하기 등이다. 섹시 스타 이효리가 남성 스타들과 한방에서 잠들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은 이런 가족 이미지 때문이다. 출연자들은 인간적 결함과 콤플렉스를 허물없이 드러내고 바로 그 대목에서 친밀감과 유대가 발동한다. <중앙일보 2008년 12월 15일자 ‘가짜여도 가족이 필요해’>

2. 아래 기사는 부부가 이해하는 시스템이 달라 섭섭한 감정을 느낀다는 내용이다. 이를 ‘부모와 자녀’ 관계로 패러디해본 뒤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본다.

아내가 “떡볶이를 사다 달라”고 하자 남편이 “어제 먹었는데 뭘 또 먹어”라고 대답했다. 결혼 3년차인 이 부부는 ‘떡볶이’ 탓에 크게 다투게 됐다. 남편은 “그깟 떡볶이 때문에 왜 그러느냐”며 아내를 이해하지 못했다. "떡볶이를 사다 달라”는 말은 “당신은 내 편이냐”를 확인하려는 질문이다. 이때 “당신이 원하면 항상 떡볶이를 사다 줄게”라는 대답을 들으면 더 이상 심부름을 시키지 않게 된다.

<중앙일보 2011년 3월 5일자 w15면 어렵지만 잉꼬 부부 되는 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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