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림 '한글 꼴' 판친다…글자 다 깨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사보 제작업무를 맡은 회사원 李모(29)씨는 지난해초 모 회사가 개발한 한글 글꼴 패키지를 20만원에 구입했다.

이 글꼴로 작업한 결과 '빼' '늘' 등 수십종의 글자가 까맣게 인쇄돼 나오는가 하면 '홍' 과 '흥' 등 비슷한 글자가 구별되지 않았다.

구입업체에 항의, "업그레이드 판(版)이 나오면 해결될 것" 이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후속 글꼴이 개발되지 않아 최근 사용을 포기했다.

대기업 연구원인 金모(35)씨는 지난해 구입한 디자인 한글 서체로 제작한 보고서를 관련 인사들에게 e-메일로 전송했다.

하지만 이를 받아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영문은 읽을 수 있지만 한글은 깨져 읽을 수 없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글꼴에 기본적인 호환 기능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전자출판 시대를 맞아 컴퓨터 상에서 사용되는 한글꼴(한글 폰트)의 개발이 봇물을 이루고 있으나 한글 생성원리나 기술적 문제 등에 대한 깊은 연구없이 졸속으로 진행되고 있다.

국내의 글꼴 개발업체는 서울시스템.산돌글자은행.씨투디투.소프트매직.폰트뱅크.한양정보통신 등 10여곳. 업체들에 따르면 시중에 유통되는 한글 폰트는 지난해말 기준으로 1천6백여종에 달한다. 특히 지난해에만 수백종의 글꼴이 만들어진 것으로 업계 관계자는 보고 있다.

하지만 이들 글꼴 중 개선작업을 거치면서 3~4년 이상 존속되는 것은 C업체의 '윤명조' 등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대부분 개발된지 1년도 안돼 사라지고 있다. 6개월을 못버티는 것도 흔하다.

반면 로마자의 경우 '유니버스' '케슬론' '타임' 등 수십종의 고품격 글꼴이 전세계적으로 쓰일 뿐 아니라 '게라몬드' 서체는 1500년대에 디자인된 후 꾸준한 개정작업을 거쳐 지금까지도 대표적인 알파벳 서체로 자리잡고 있을 정도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속 글꼴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업체들 중에는 글꼴 1벌을 개발하는데 2백만원의 적은 비용을 투입, 불과 15일 만에 제작해 출시하는 경우까지 있다.

또 디자인이 뛰어난 한글 서체라 하더라도 같은 패키지에 들어있는 한자.영어의 디자인과 통일성이 없게 개발돼 실제 사용하면 기형적인 모양이 나올 때가 많다.

업체 관계자들은 졸속 개발의 이유로 한글 서체가 저작권보호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점을 꼽고 있다. 한 업체가 개발한 글꼴이 인기를 끌면 며칠만에 비슷한 글꼴이 시장에 출시되고 있는 형편이다.

글꼴개발자협의회 도상권(都相權)회장은 "투자금을 회수할 길이 없는 업체들에게 수년에 걸쳐 기능성까지 고려한 작품을 만들어내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 라면서 "글꼴 시장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유럽처럼 저작권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이 필수적" 이라고 주장했다.

김성탁.하현옥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