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지면 북한 감싸는 중,러시아...한국 존재감 키우는 게 해결 방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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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호 14면

#장면 1=2010년 12월 18일 오전 9시 미국 뉴욕. 박인국 주유엔 한국대사(당시)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비탈리 추르킨 주유엔 러시아대사였다. 목소리가 다급했다.
“박 대사, 한국의 연평도 사격훈련으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를 소집해 사격훈련 중지 결의안을 내도록 건의할 겁니다.”
박 대사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약 한 달 전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로 2명의 민간인이 사망해 한국은 방어적인 정기 사격훈련을 하는 것인데 러시아가 이를 문제 삼은 것이다. 자칫 한국이 피고석에 설 판이다. 박 대사는 시계를 봤다. 한국은 이미 오후 11시. 본부와 협의해야 하는데…. 시간을 벌어야 했다.

“추르킨 대사, 한국은 이미 한밤중입니다. 본국에 보고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회의 소집 요청은 내일 하겠습니다.”
그때부터 박 대사의 전화는 바빠졌다. 서울의 외교부는 물론 안보리 우방, 상임·비상임 이사국 관계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고, 만날 약속을 잡고 설명을 했다. “러시아를 막고 한국을 지지해 달라”고 했다. 상임이사국 중 미국·영국·프랑스와는 이미 그해 3월 북한의 천안함 사건 뒤 안보리 의장성명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긴밀히 공조했던 터였다. 비상임이사국 측과도 일일이 접촉했다. 하루가 짧았다. 밤에도 전화기는 쉬지 않았다.

19일 오전 유엔본부 안보리 회의장. 추르킨 대사가 “한국이 포 사격훈련을 취소할 것을 촉구하며 북한은 상황의 극적 전개로 이어질 수 있는 어떤 행동도 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남북에 각각 7분간 의사 진행 발언이 주어졌다. 박 대사는 “이번 사격훈련은 방어적인 성격이며 정례적 훈련”이라고 강조했다. 이사국 간 실랑이가 벌어졌다. 결국 이날 회의는 합의 없이 끝났다. 지난달 서울에서 만난 박 대사는 “잘못하면 우리가 트러블메이커가 될 뻔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안보리 이사국이 북한을 비난하는 계기로 전화위복이 됐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장면 2=뉴욕 유엔본부 2층 안보리 회의장 옆엔 몇 개의 작은 회의실이 있다. 안보리 이사국과 현안이 있는 나라의 긴밀하고 숨가쁜 협상이 오가는 곳이다. 1996년 9월엔 박수길 당시 주유엔 대사가 이 회의실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북한이 무장간첩 26명을 태운 350t급 잠수함을 강원도 강릉 앞바다로 침투시킨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당시 비상임이사국이었던 한국은 안보리 회의 소집을 요구해 북한 규탄 결의안을 제출했다. 중국은 늘 그렇듯 북한을 감쌌다. 당초 목표로 했던 결의안에서 한 수위를 낮춰 의장성명을 목표로 했지만 녹록지 않았다. 그런데 박 대사의 귀에 당시 중국 첸치천(錢其琛) 외교부장이 유엔 총회 연설차 유엔본부에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마침 공로명 당시 외교부 장관도 뉴욕에 있었다. “첸 장관과 담판 지어야 한다. 지금이 호재다.”

9월 20일 중국의 첸 부장과 주유엔 대사, 한국의 공 장관과 박 대사 4명이 안보리 소회의실에 앉았다. 의장성명은 어림없다는 중국이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우리 측 설명을 말없이 듣던 첸 부장이 중국 유엔대사에게 말했다. “의장성명을 내도록 합의하시오.” 긴 줄다리기가 담판 하나로 끝났다.

모두 분단국 한국과 안보리의 관계를 보여 주는 사례다. 올해 7월 주유엔 대사직을 마치고 돌아온 박인국 대사는 “분단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던 시기”라며 “유엔에서 우리의 존재감을 키우는 것이 현실적인 답”이라고 말했다.

선문대 박흥순(국제관계학·유엔체제협회장) 교수는 “분단국 한국에 안보리는 북한을 제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중요한 틀인데 한국이 그 틀에서 주요한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며 “중국과 같은 강대국의 반대로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못 내는 게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건국, 6·25전쟁, 북핵 제재 결의까지 유엔과 줄곧 인연을 맺어 온 한국은 유엔 가입 20주년을 맞아 외교적 영향력을 넓혀야 한다”며 “이를 위해 정교하고 중장기적인 전략을 짜야 할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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