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번째 편지 <당신과의 저녁 식사(2)-초밥 먹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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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일 간의 휴가에서 이틀을 저에게 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이 편지는 당신이 방콕에 도착한 다음에야 받아보겠군요.

오늘 당신과 나는 광화문에서 만났습니다.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복도에 있는 <문화사랑>에서였습니다. 날씨가 좋은 한낮의 찻집은 마음을 수수롭게 하고 강물이 풀린 것처럼 마음이 여유로워지게 합니다. 밖엔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빛은 하얀 것을 더욱 희게 보이게 하며 밝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예민해 보였습니다. 사실 여인들은 예민할 때가 워낙 많아 그 이유를 알아내기가 몹시 힘듭니다. 쉽게 생리 중인 모양이라고 생각해 보지만 이것은 초보적인 수준의 이해에 불과합니다.

스타킹의 올이 나가도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신경질을 냅니다. 손톱 끝이 조금 떨어져 나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쪽에서는 아무 원인 제공을 한 일이 없는데도 묵묵히 그 예민함을 견디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여자로 존재하는지도 모릅니다. 남달리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어도 매사에 둔한 반응을 보이면 남녀 관계가 아니라 그냥 친구 사이가 돼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어떤 여자가 자꾸 예민하게 보이면 이쪽에 관심이 있다고 해석해도 무방합니다. 아주 극소수를 제외하면 둔감한 여자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쪽에 친구 이상의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맞습니까?

찻집을 나올 때 당신은 내게 이런 말을 툭 집어던졌지요. "그런데 우리가 무슨 관계죠? 벌써 여러 번 만났는데 통 감이 잡히지 않는군요."

나는 에둘러서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관계라는 건 저마다 고유해서 규정지을 수 없는 겁니다. 현재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옳습니다. 가령 우리는 현재 서로 편지를 주고받고 있고 시간이 나면 만나서 영화도 보고 식사도 함께 합니다. 나는 이런 상태가 아주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단가요? 하지만 그건 식물적이잖아요. 상상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모르시는군요. 식물도 저마다 꿈을 꿉니다. 음악을 들을 줄도 압니다. 그러니 꽃이 피나 안 피나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웃긴 사람."

찻집을 나와 세종문화회관 뒤편 계단을 통해 분수대가 있는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다소 심각한 얘기를 나눈 뒤라 서먹한 느낌이 드는 가운데 갑자기 할 일을 생각나지 않더군요. 오후 5시.

주위를 들러보니 <가을>이란 카페가 눈에 띄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옆으로 해서 미도파 빌딩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다 보면 <봄><여름><가을><겨울>이란 네 개의 카페가 꽃집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습니다.

<봄>으로 가자니까 당신은 싫다고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하긴 방금 찻집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 술을 먹기에는 이른 시각이었죠. 그때 당신이 이랬지요.

"저기 <여름>과 <가을> 사이에 초밥집이 있네요? 마침 배가 고픈데 그리로 가죠."

당신이 가리킨 곳은 <삼전(森田) 초밥>으로 광화문에 나오게 되면 나도 가끔 들르는 곳이었습니다. 우선 값이 싼 편이고 맛도 좋습니다.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나는 당신을 따라 <삼전초밥>으로 들어갔습니다.

집마다 특징이 있지만 여기 초밥은 쌀의 쫀득거림이 좀 덜한 게 흠입니다. 같은 예로 홍대앞 <도모>는 묵은 쌀을 써서 쫀득거리기 때문에 매우 감칠맛이 납니다. <삼전>은 물기가 많은 햅쌀을 쓰는 것입니다.

또 <도모>는 쌀 뭉치 위에 올려지는 회가 얇고 그 넓이나 양이 적은데 비해 <삼전>은 푸짐하게 회를 올려놓습니다. 각기 장단점이 있겠지만 저는 <도모> 편입니다. 많고 푸짐한 것은 우리 음식의 미덕이며 장점에 속하는 부분입니다. 회와 마찬가지로 초밥도 모양새와 색깔이 우선인 것입니다.

아무튼 스탠리스 회전판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접시를 집어내 초밥(스시)을 먹습니다. 초밥엔 와사비가 이미 들어가 있으므로 간장만 생선에 적셔 먹으면 됩니다. 밥에 간장이 묻으면 정갈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종류를 달리해 먹을 때는 그 사이마다 초생강을 하나씩 씹어 줍니다. 가령 광어 초밥과 새우 초밥 사이에 초에 절여 얇게 썰어놓은 생강 한조각을 먹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광어 맛을 지우고 새우 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초생강은 그런 마침표의 역할을 해주는 것입니다.

저는 회전 초밥집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시각적 효과를 즐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하나의 접시 위에 청, 황, 적, 백, 흑 이렇게 다섯 가지의 초밥을 모아놓고 하나씩 집어먹어야 나름대로의 연속성과 상상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먹는 순서는 담백한 재료부터 기름진 재료 순으로, 또 흰색 붉은색 푸른색 순서가 좋습니다. 흰살 생선은 도미와 광어, 붉은살 생선은 참치, 푸른살 생선은 학꽁치 고등어 등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조개류, 알류, 새우와 장어 순으로 먹는 게 좋다고 합니다.

좀 복잡하긴 하지만 이런 방식이 누대에 걸쳐 내려온 까닭이 있겠지요. 더 제대로 먹으려면 인도 사람들처럼 손으로 직접 집어먹는 것인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게걸스럽게 느낄 염려가 있으므로 그만 두기로 합니다. 다 먹은 다음엔 된장국을 마십니다.

따끈한 녹차가 더욱 좋지만 초밥집에선 녹차를 주지 않습니다. 녹차는 초생강처럼 다른 생선의 냄새를 없애 주며 목막힘도 살펴주는 두 가지 효과가 있습니다. 된장국과 초생강의 두 가지 역할을 도맡아 하는 것입니다.

꾸역꾸역 초밥을 입에 집어넣는 당신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니 마치 화가 나 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욕구불만 때문에 무조건 입에 처넣고 있는 듯했습니다.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초밥엔 쌀덩이가 붙어 있어서 각 초밥 간 사이를 두지 않으면 자칫 게걸스러워 보입니다. 초생강으로 최소한 일 분을 버텨야 하는 것입니다. 염장시킨 파뿌리도 가끔 먹어줘야 합니다. 그래야 간이 맛습니다.

서두르지 않았으면 합니다. 좀더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저런 과정(추억)이 쌓이면 비의를 품은 시간이 당신과 내게 어떤 선물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난들 왜 서두르고 싶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오늘 식물 얘기를 하셨지만 남녀 관계는 화분을 키우듯이 가져가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네,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터득한 일이라고 솔직히 얘기하겠습니다.

사람 관계야 말로 인위적인 힘을 허락치 않는 것 같습니다. 서로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둘 사이로 희미하게 빠져나가는 시간이 그때마다 던져주는 의미를 감지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믿고 있습니다. 사랑, 그것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시간의 이름으로 무언가가 불현듯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식물에 꽃이 피듯.

이미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느낌을 받고 가슴에 조용히 파문이 일었던 하루였습니다. 초밥집을 나와 <봄>으로 올라가며 언뜻 잡았던 당신 손의 느낌이 아직도 온몸으로 선연히 번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몸을 씻지 않고 잘 생각입니다. 손을 씻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다시 만날 때를 기다리며 오늘은 이만 접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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