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장한 '和의 정치"…다케시다 전총리 거취로 시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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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계가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76)전 총리의 거취문제로 시끄럽다. 회사로 치면 그는 상임고문쯤이다. 그런 그의 완전 은퇴가 주목받는 이유는 두가지 때문인 것 같다.

하나는 권력의 역학관계 변화다. 1987년 자민당내 다케시타파 결성 이후 다케시타는 권력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정치자금 스캔들로 89년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정권의 총설계사를 맡았다.

우노 소스케(宇野宗佑).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내각 탄생때 열쇠를 쥔 것은 그였다. 의원 1백여명의 최대 파벌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다케시타의 꼭두각시 정권' 이라는 비아냥은 불가피했다.

92년 파벌 영수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전 총리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그의 힘은 여전했다.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오부치 전 총리는 그의 정치 문하생이었다.

98년 자민당의 참의원 선거 참패 직후 "사무라이(무사)의 길" 이란 그의 한마디로 하시모토는 총리에서 물러났다. 오부치 내각은 '제2차 다케시타 내각' 이라는 평가마저 듣고 있다.

정권 출범과정도 그렇지만 오부치가 '그림자도 밟지 않는 스승' 으로 섬긴 그에게 늘 자문했기 때문이다. 그의 은퇴는 10여년에 걸친 '다케시타 시대' 의 종언에 다름 아니다.

또 다른 하나는 다케시타류의 정치가 퇴장할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관심을 끄는 것이다. 다케시타는 이념이나 논리보다 화(和)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다. 파벌은 버팀목이었지만 수(數)로 밀어붙인 것만은 아니었다. 정보 교차로를 선점해 늘 물밑조정에 철저했다.

그한테 '언어 명료.의미 불명' 이란 말이 따라다닌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남에 대한 배려로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꼬였다. 노조 간부.야당 의원의 뒤까지 봐주었다.

그래서 한 신문은 그를 '호송선단식 취업 알선업자' 로 비꼬기도 했다. 그가 관청가 인사문제에서 10년 앞까지 내다보도록 훈련받은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너무나 일본적인 정치인이었다.

그의 퇴장으로 자민당은 유력 파벌없는 전국시대를 맞을 수도 있다. 세대교체도 앞당겨질 것이다. 야당과 시민단체는 조정형 정치가 막을 내릴 것으로 기대한다. 일본 정치의 전환기가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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